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북 완주(完州) 사람이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거의(擧義)를 선포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고산(高山)에 세거(世居)하던 고흥(高興) 유(柳)씨 일문(一門)에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거의를 결정하였다. 이에 그는 같은해 6월 초순, 지방호민(豪民) 1백여명을 모아 의병단을 조직하고 익산(益山) 의병장 이규홍(李圭弘)과 연계하면서 항전을 벌여나갔다. 같은해 11월에는 이동승(李東承)으로부터 2회에 걸쳐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09년 9월 일제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 벌여진 이후 항전을 중단하였으나 일제의 보복을 피해 귀가하지 못하고 각지를 전전하던 중 부일배의 밀고로 1916년 6월 6일 붙잡혔다. 그리하여 1917년 2월 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 살인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8년 8월 15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高興柳氏一門 九義士蹟碑中 功績文
- 除籍謄本
- 判決文(1917. 2. 8 光州地方法院 全州支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