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북도 고산(高山)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그때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해 한국군마저 강제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유지명은 일제의 내정간섭을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고 1907년 9월 초순경부터 스스로 창의대장 또는 삼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삼남의병대장의 인장이 찍힌 의병모집 격문 1통과 의병모집 및 부하 계식(戒飾)의 취지를 기재한 문서 2통을 만들어 이를 게시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총 수백 정을 정비하고 각 부서를 정하였다.
한편 군자금의 확보를 위하여 호남의 대부호인 김 진사의 사음 이성순(李聖順)외 수십 명에 대해서 도조 수백 석을 보관해 둘 내용의 문서 4통을 만들어서 군량 징발의 준비를 하고 때로는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전라북도 용담군 고산군 및 충청남도 은진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9월 22일 용담군 건무리(乾無里)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위시해서 그후 수회에 걸쳐서 용담·고산·은진 일대에서 일본 보병·기병·헌병 등과 접전하였다.
10월 3일 밤 유지명은 부하 정성일(丁成一)·김치삼(金致三) 등 수십 명을 이끌고 용담군 읍내의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가 대석(大石)·뇌천(瀨川)을 사살하고, 한국인 경찰 정상권(鄭尙權)을 쓰러뜨리고 무기를 탈취하여 돌아왔다.
1908년 12월 24일 윤병오(尹炳五)라는 사람이 의병을 사칭하고 겁탈·강간을 일삼아 의병의 명예를 실추시키므로 부하 유치복(柳致福)을 시켜서 살해하였다.
이상의 의병활동 중 많은 위험한 고비도 겪었다.
특히 1908년 7월 13일 일헌병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주하여 몸을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09년 1월 23일 일헌병에게 다시 체포되어 3월 22일 광주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대로 형이 확정되어 교수대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606·665·666·702·703·704·707·708·84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5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