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1895년 정산(定山)에서 기의하여 1896년 1월 안병찬(安炳瓚)·채광묵(蔡光默) 부대와 홍주(洪州)에서 합류하여 김복한(金福漢)을 의병장으로 하고 송병목(宋炳穆)을 서면소모관(西面召募官)으로 하여 정제기(鄭濟驥)와 함께 임존산성(任存山城)을 수축하는 등의 활동을 폈으나 홍주관찰사(洪州觀察使)였던 이승우(李勝宇)의 변심으로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 등이 붙잡히는 바람에 의진(義陣)이 와해되었다.
1906년 1월에 안병찬(安炳瓚)·채광묵(蔡光默) 등과 다시 기의하여 대흥(大興)에서 3월 중순에 전투태세를 가다듬어 홍주로 진격하였으나 일본군부대와 접전을 벌이다가 패전하여 안병찬(安炳瓚) 등과 같이 10명 정도가 붙잡혔으나 4월에 공주(公州) 감옥에서 동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06년 4월 민종식(閔宗植)이 홍산(鴻山)에서 기의하여 홍주(洪州)로 진격하면서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니 일본군이 예산(禮山) 방면으로 도주하므로 홍주(洪州城)을 탈환하였으며, 이때 민종식(閔宗植) 의병진영에 가담하여 안병찬(安炳瓚)·안항식(安恒植) 등 5명과 함께 참모사로 임명되어 의진(義陣)을 정비시키고 있을 때 일본군의 역습으로 10일 간에 걸친 홍주(洪州) 대공방전에 참전하였으나 다시 일본군에게 함락당하였다.
그후 재기를 도모하기 위하여 1906년 10월 예산(禮山)지방을 중심으로 의사(義士)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으며, 11월 20일 예산읍(禮山邑)을 근거지로 삼아 김덕진(金德鎭)·황영수(黃英秀) 등과 함께 민종식(閔宗植)을 대장으로 재추대하기로 하고 거사할 준비를 갖추었으나 한곡(閑谷) 근처의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보이는 밀정에 의해 사실이 일본헌병에게 누설됨으로 10월 2일 민종식(閔宗植)이 붙잡혀 거사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48·49·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259·261·263·315·317·319·327·329·33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71·172·347·5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