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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346
성명
한자 金漢鍾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0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광복단(光復團) 단원(團員), 무기구입, 군자금 모집에 활약, 충청도지부장(忠淸道支部長)

2. 1918년 1월 24일 충남(忠南) 아산군(牙山郡) 도고(道高)((谷))면장(面長) 박용하(朴容夏)임봉주(林鳳柱), 김경태(金敬泰)를 시켜 살해함.

3. 체포되어 광복단장(光復團長) 박상진(朴相鎭)과 함께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사형 집행됨.(동아일보(東亞日報) 1921.8.13.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92, 항일구국의열사전(抗日救國義烈士傳)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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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유가(儒家) 출신인 그는 1906년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진(洪州義陣)에 종군하였으며 1917년에는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광복회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1915년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동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광복회의 충청도 책임자였던 김한종은 박상진(朴尙鎭)과 함께 친일부호 처단을 주관하였다. 그는 동지포섭에 힘을 쏟으면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을 위해 장두환(張斗煥)·엄정섭(嚴正燮) 등과 함께 충청도 지방 부호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또 1917년 11월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참여하였으며 1918년 1월에는 그의 지휘 아래 당시 악질면장으로 지목되어 처단대상이었던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 등이 처단하게 하였다.

그후 동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8년초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예심종결결정서(1918. 10. 19 공주지방법원)
  • 기려수필 31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2·458·496·5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7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27면
  • 고등경찰요사 180·18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673∼73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한종 자 : 경수(敬受), 호 : 일우(一宇) 충청남도 예산(禮山) -
본문
1883년 (음)1월 14일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광시면(光時面) 신흥리(新興里)에서 아버지 김재정(金在貞)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자는 경수(敬受), 호는 일우(一宇)이다.가문은 대대로 충과 효를 중시한 집안이었다. 12대조 김덕남(金德南)이 임진왜란 당시 조헌(趙憲) 의병부대에 참여하였고, 7대조 김방언(金邦彦)과 그 아들 김치화(金致和)는 지극한 효행으로 정조(正祖)로부터 정려문(旌閭門)을 하사받았다. 아버지 김재정은 지역에서 한학을 가르치며 제자를 양성, 항일의식을 고취한 인물로 1906년 민종식(閔宗植)의 홍주 의병부대에서 의병 모집과 군량을 담당하는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하였고 광복회(光復會)에서도 활동하였다. 숙부 김재풍(金在豊)을 비롯한 김성묵(金成默)·김원묵(金元默)·김재철(金在哲)·김재인(金在仁) 등 문중 사람들도 대거 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집안의 영향으로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점차 항일의식을 키워나갔고 성장 후 서당교사를 했다고 전해진다.1916년 7월 김경태(金敬泰)·김재창(金在昶)·이철영(李哲永) 등과 조선총독이 충남 부여를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선총독과 일제 고위 관리들을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경찰의 탐지로 자택을 압수 수색 당해 수포로 돌아갔다.재기를 도모하던 중 채기중(蔡基中)의 소개로 일명 ‘대구권총사건’으로 대구감옥에서 막 출옥한 박상진(朴尙鎭)과 1917년 7월 27일 만나 광복회에 가입하였다. 경주 박상진의 자택에 모여서 채기중, 우재룡(禹在龍)과 함께 독립을 위해 무기 등을 구입할 군자금 모집에 뜻을 모으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부호들에게 포고문(佈告文)을 발송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기로 결의하였다.이들 4인이 각각의 임무를 나눌 때, 충청도 지역의 제반 사무와 부호 조사, 군자금 모집을 맡았다. 채기중은 경상도 지역에서 제반 사무와 부호 조사 및 군자금 모집을, 우재룡은 중국 방면에서 국내로의 포고문 발송을, 박상진은 군자금으로 병기 구입을 담당하기로 역할을 나누었다. 그리고 ‘비밀, 폭동, 암살, 행령’ 등 네 가지 행동강령을 채택하였다. 또한 전 경상도 관찰사인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여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이들은 본부를 대구의 상덕태상회(商德泰商會)에 두고 국내와 만주 등지에 여관이나 곡물상 등을 연락사무소로 설치하여 광복회 조직을 확장하였다. 이때 충청 지역 책임자로 예산·연기·인천에 곡물상을 설치하여 광복회 충청도지부의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총사령 박상진과 자주 회합하여 광복회의 대소사와 의거 계획을 논의하는 등 광복회 내 역할과 비중이 컸다. 광복회 부사령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만주지역 사령관을 맡았던 이석대(李奭大)가 평양 은산금광(殷山金鑛)에서 붙잡히자 1917년 9~10월경 서울 남대문 인근 남문여관(南門旅館) 어재하(漁在河)의 방에서 박상진, 김좌진(金佐鎭)과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김좌진을 만주 총사령으로 파견하고 광복회에서 군자금 6만 원을 마련하여 지원하였다. 이때 전별시(餞別時)를 지어 김좌진을 격려하였다.1917년 8월경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유창순(庾昌淳)을 광복회에 가입시키고, 같은 해 10월 10일 유창순과 함께 박상진의 집에 모여 장승원 처단 계획을 논의하였으며, 그 다음 날 채기중을 만나 실행을 지시하였다. 채기중은 11월 10일 유창순, 강순필(姜順必)과 함께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북삼면(北三面) 장승원의 집에 잠입하여 처단하였다.군자금 모집과 회원 확보를 위해 평소 친분이 있던 장두환(張斗煥)을 규합하고 1917년 10월 23일 박상진, 장두환과 함께 그의 집에서 모였다. 이때 권총 구입 등 군자금 확보를 위해 충청 지역 각지를 돌며 자산가를 조사하기로 하였다. 이에 서산·홍성·예산·보령지역의 부호를 조사하기로 하고, 장두환에게 천안·아산·안성·연기지역, 엄정섭(嚴正燮)에게 공주·청양·부여·논산지역을 맡겼다. 조사한 부호들의 명단은 장두환이 취합, 인명부를 작성하여 박상진에게 전달하였다.1917년 12월 초 경북 안동군(安東郡) 풍서면(豊西面) 가곡리(佳谷里) 부호 권준흥(權準興)에게 “한일병합 후 우리들은 나라가 없는 분함이 극심하다. 당신들은 편안하게 거저 놀고먹고 있는데 국사를 회복하기 위해 분주하다. 이를 위해 군자금이 필요하니 5천 원을 내놓아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군율에 의해 처분할 것이다”라는 경고 문서를 보냈다. 그 후 12월 12일경 채기중과 함께 그의 집에 찾아가 300원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이러한 군자금 모집 활동은 계속하여 1918년 1월 26일 자택에서 김재풍·김상준(金商俊)에게 홍성군 광천면(廣川面) 내죽리(內竹里)의 정인교(鄭仁敎)에게 지정한 군자금을 수령하도록 명령하고, 다음날 27일 김재풍·김상준·정태복(鄭泰福)이 정인교의 집에 가서 100원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자금 모집 외에도 장두환 등과 함께 지역 내 유력 인사들을 광복회에 가입시켜 60여 명에 이르는 지부 회원을 확보, 광복회 충청 지부의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1917년 11월~12월경 서울 남문여관에서 박상진과 회합하여 우재룡이 중국에서 포고문을 발송한 대부호 이외의 소자산가에게도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동일한 성격의 문서 발송을 협의하였다. 이에 12월부터 1918년 1월경 고시문(告示文)을 작성하였다. 이를 부친의 제자 이재덕과 홍성군 장곡면장(長谷面長) 정태복으로 하여금 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하여 200장을 등사하도록 시켰다.1918년 1월 20일과 21일 양일 “동포는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이를 돕고 특히 재물로 할 수 있는 자는 재물로 이를 도와야 할 것이다. 이 의연금을 요구하는데 각자 이에 대한 지원에 태만하면 본회의 군율로서 처단하겠다”는 고시문을 장두환과 김재창, 임봉주(林鳳柱)로 하여금 서울 및 각지에서 우편으로 발송하게 하였다.1918년 1월 23일경 천안역 인근 이강헌(李康憲)의 집에서 장두환, 임봉주, 김경태와 함께 군자금 징수의 임무 수행과 불응 시 무력을 사용해 2~3명을 처단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는 통고문을 받았으면서 이를 헌병에게 넘긴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인은 부하 면서기 가족을 결식하게 만들었고, 또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惡人)인데 광복회에 찬성하지 않고 또 의연금을 내놓지 않으니 동인을 죽여 다른 사람을 위협하자”고 하면서 장두환에게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을 명령하였다. 이에 장두환은 김경태, 임봉주에게 실행을 지시하였다. 권총 2정을 수령 받은 두 사람은 다음 날 1월 24일 오후 7시경 아산군 도고면(道高面) 신유리(新柳里) 박용하의 집에 잠입하여 사형선고문을 전달한 후 총을 쏴 처단하였다.이 사건으로 1918년 1월 말 장두환이 천안 성환에서 체포되면서 광복회 회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벌어져 같은 달 예산군 자택에서 붙잡혔다. 이때 박상진을 비롯한 채기중, 김경태, 임봉주, 유창순, 장두환, 김재창, 김재풍 등 광복회 회원 37명이 함께 붙잡혔다.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살인, 방화, 강도 등으로 사형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음 해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1920년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 2심에서도 원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사형은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1920년 11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형이 바뀌지 않았다. 끝내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경 대구감옥에서 박상진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갈살인, 방화, 강도, 총포화약류 취체령위반 공소 기각 경성복심법원 1919-09-2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갈, 살인, 방화, 강도, 총포화악취체령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20-03-01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갈, 살인 사형(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20-09-11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갈, 살인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0-11-0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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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남도 예산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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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공원 대한광복단 기념공원 경상북도 영주시
2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3 비석 김한종선생순국기념비 충청남도 예산군
4 장소 김한종선생유적지 충청남도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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