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 (日帝) 의 강제 (强制) 로 인 (因) 하여 국권 (國權) 이 침탈 (侵奪) 되자 이승희 (李承熙) (‘77 대통령장 (大統領章) ), 조정규 (趙貞奎) 등과 국권 회복 (國權回復) 의 대사 (大事) 를 담론 (談論) 하고 1916년 마침내 국권 회복 (國權回復) 을 도모 (圖謀) 하여 이승희 (李承熙) , 조정규 (趙貞奎) , 김사진 (金思鎭) 등과 함께 만주 덕흥보 (滿洲德興堡) 에 정착 (定着) 하고 농장 (農場) 을 경영 (經營) 하다 2년후 (年後) 자금조달 (資金調達) 을 위하여 귀국 (歸國) 하였으며 1919.4월 파리장서 (巴里長書) 서명 운동 (署名運動) 이 일어나자 137명중 (名中) 1인 (人) 으로 서명 (署名) 하고 군자금 모집 (軍資金募集) 과 동지 (同志) 규합 (糾合) 을 위 (爲) 해 활동 (活動) 하다가 뒤늦게 일경 (日警) 에게 피체 (被逮) 되어 수 개월간 (數個月間) 대구형무소 (大邱刑務所) 에 수감 (收監) 되었다가 출감 (出監)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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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1910년 국권회복을 위하여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조정규(趙貞奎)·김택진(金澤鎭)과 교유하면서 국가대사를 논하였다. 1916년 마침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이승희·조정규·김사진(金思鎭)과 함께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가서 덕흥보(德興堡)에 정착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경영하다가 2년 후 농장자금 조달을 위하여 귀국하였다.
1919년 4월 경상도(慶尙道)에서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장석영(張錫英)·송준필(宋浚弼) 등이 주동이 되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서명운동을 펼치자 이에 참가하여 137명 중 한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군자금 모집과 동지규합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그는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수개월만에 출감하였으며 곧바로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독립운동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247∼252面
- 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257面
- 朴殷植全書 上卷 599∼602面
- 3·1運動實錄(李龍洛) 1045∼1049面
- 畏齋 丁泰鎭小傳(韓國名人小傳 : 李家源著) 247面
- 畏齋文集(木刻版) 第14卷 2面
- 翁金昌淑一代記(心山事業會) 95∼98面
- 韓溪遺稿(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534面
- 畏齋文集 附錄 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935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