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경북 풍기(豊基) 출신으로 1908년 이용구의진(李容九義陣)에 소속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909년 김상태의진(金尙台義陣)에 소속되어 충북 제천(堤川)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용구의진은 1908년 경북 북부지역 풍기·순흥·영주·봉화 일원에서 활동했던 김상태의진에 속한 소규모의 의병부대로 추정된다.
김상태는 충북 영춘군 남천 출신으로 1896년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 이강년과 함께 참여하였다.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이강년과 함께 따라가 3년 뒤 귀국하였다.
1905년 7월 충북 단양에서 정운경과 함께 창의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이 도창의대장에 추대되자 김상태는 중군장으로 참여하여 순흥·봉화·풍기·영춘·영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체포·순국한 뒤, 그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독자적으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1909년 3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는 등 1911년 6월까지 강원도·경상도·충청도 등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김상태부대는 소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가면서 각처에서 게릴라적인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상태·정경태·최성천·윤국범 등의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1910년 11월 25일부터 동년 12월 20일에 걸쳐 소위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1911년 6월 14일 순흥의 연화동에서 일본군 대위 편종겸이 거느린 토벌대의 야습을 받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단식·순국하였다.
윤석오는 1908년 2월 이용구와 함께 경북 순흥군 대평면(大坪面) 묵동(墨洞)의남윤오(南允五)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 하였고, 동년 3월 이용구와 함께 강원도 영월군 칠령(七嶺) 방면에서 군량과 군수품 등을 모집하였다. 윤석오는 김상태의진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중, 1909년 12월 12일 충북 단양에서 제천경찰서 단양주재소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윤석오는 소위 강도(强盜) 및 폭동죄(暴動罪)으로 기소되어 1910년 1월 1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동년 2월 19일 경성공소원 형사부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刑事控訴事件簿
- 判決文(京城控訴院:1910. 2. 19)
- 受刑人名簿
- 暴徒逮捕의 件建)1909. 12. 24) 暴徒에 關한 編冊(警務局)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5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