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경북 영주(榮州)에서 풍기청년회·노농교육연구회·신간회 영주지부·영주농민조합 등의 단체에서 간부 또는 회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안기석은 1924년 2월 21일에 조직된 경북 영주의 풍기청년회 간부로 활동하며, 청년의 자각을 촉진하고 생활의 개선에 힘썼다. 1925년 5월 11일, 영주에서 노농교육연구회(勞農敎育硏究會)를 창립하여 노동자·농민 교육과 복리 증진에 노력하고, 이들의 결속을 견고히 하였다. 또한 각 마을의 야학 교육의 상황을 관찰·장려하기 위해 순회 교원을 두었으며, 순회강의·토론·문예회 등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안기석은 김준상(金俊相)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경상북도 내 각 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청년 단체원 등을 선동하여 시위를 일으키려고 격문을 제작,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1930년 1월 31일 안기석은 김준상의 원고를 정정한 후, 「학생제군에 檄함」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300여 매를 인쇄하였다. 그날 밤 풍기공립보통학교 각 교실에 격문을 살포하고, 풍기농민조합 및 풍기청년동맹지부 사무소에 2매, 읍내 우진팔(禹鎭八) 집에 2매, 노동야학당에 2매를 투입하였다. 그리고 인쇄한 격문을 1매 내지 6매를 봉투에 넣어, 2월 3일에 대구 사립 복명학교 교사 최두한 앞으로 보내고, 4일에는 김천·안동·순흥 각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이 사건으로 안기석을 비롯하여 19인이 검거되었다.
안기석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을 거쳐 대구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약 4개월 동안 취조를 받았고, 1930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주거침입, 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1931년 5월 9일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30. 7. 9)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朝鮮日報(1930. 4. 18, 6. 5)
- 倭政時代人物史料
- 韓國共産主義運動史(李起夏) 1385~138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779~78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