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풍기(豊基) 사람이다.
의병장으로 경북 풍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신봉균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부르짖고 향리인 풍기에서 8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거의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어 적성(赤城)을 출발하여 주흘관(主屹關)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날 적군이 내습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여 백운동(白雲洞) 송림으로 옮겼다. 그런데 야밤에 적들이 내습하여 군졸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또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단신으로 초암사(草菴寺)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자주적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통치권을 장악하는 등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갔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에 을미의병에 참가했던 의병들이 재봉기하는 한편,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신봉균도 이같은 시기에 재기를 모색하던 중, 1907년 10월 붙잡혀 유인석 의병장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제에게 끝까지 항거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74면
- 의병대장 학암 신봉균선생 행장(유해동찬, 1970)
- 의암집 하권 69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