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 6월 김창숙 (金昌淑) 의 독립기지 조성 (獨立基地造成) 을 목표 (目標) 로 군자금 모집 (軍資金募集) 을 위하여 입국 (入國) 한 형 (兄) 송영호 (宋永祜) 의 활동 (活動) 을 지원 (支援) 하면서 소유답 (所有畓) 을 매각 (賣却) 한 대금 (代金) 600원 (圓) 을 제공 (提供) 한 활동 (活動) 을 비롯하여 1927. 9월에는 영주군 (榮州郡) 신간회 대표 (新幹會代表) 와 청년동맹 (靑年同盟) 집행위원 (執行委員) 으로 항일 (抗日) 의 선봉 (先鋒) 에서 활동 (活動) 하다가 피체 (被逮) 되는 등 1930년까지의 항일활동 (抗日活動)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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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1925년 6월 무관학교 설립자금 모집을 위해 북경에서 입국한 제2유림단(儒林團)의 핵심인 형 송영호(宋永祜)와 함께 활동하면서 본인 소유의 논 1,300여 평을 매각한 대금 600원을, 형을 통해 김창숙(金昌淑)에게 군자금으로 송금하였다.
1926년 2월 일경이 형 송영호로 오인하여 붙잡혔으며 심한 고문을 받다가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생명은 건졌다. 그후 부인 유임이(柳任伊)도 비명횡사케 되어 더욱 항일의식이 고양되었다.
1927년 9월 영주군의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 회원 및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 집행위원으로 항일의 선봉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3월 7일 일경에 붙잡혔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1년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탈출,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봉천성(奉天省) 안동(安東)에서 일경에 붙잡혀 2개월의 구류처분을 받은바 있으며 서울 팔판동(八判洞) 등지로 이주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東亞日報(1926. 4. 21)
- 朝鮮日報(1926. 4. 21, 4. 28)
- 時代日報(1926. 5. 22)
- 訊問調書(大邱地方法院)
- 刑事事件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