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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328
성명
한자 金輝珽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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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895년 (末) 유인석(柳麟錫)거의(擧義)동조(同調)하여 순흥(順興)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활동하였으며, 운강 의진(雲崗義陣)과도 연대하여 항전(抗戰)하였고 아들 건규(建奎)가 부친을 대신해서 피체(被逮)되어 순국(殉國)한 뒤에도 계속 활동(活動)하던 중 병사(病死)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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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순흥(順興) 사람이다.

의병장으로 경북 순흥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김휘정은 1895년 8월 일제가 경복궁에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하였다는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한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과 복제개혁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토역복수(討逆復讐)를 부르짖고 향리인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순흥지방에서 활동하는 한편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의진과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이후 그는 여러 차례 전투로 말미암아 군사가 흩어지고 병기가 부족하여 그를 수습하기 위해 험지에 자리잡고 있을 때, 적들이 쳐들어와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 때 그의 아들 김건규(金建奎)가 자청하여 잡혀가 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여러 전투에서의 부상과 아들의 옥살이로 인한 충격 때문에 병들어 순국하였다. 이 때 유인석 의병장은 글을 보내어 위문하기를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천고의 대의를 일으키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죽음을 대신하였으니, 이는 효도에 죽도 또 대의에 죽은 것이라. 모두 천하 후세에 길이 칭찬받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함께 연합전투를 한 이강년 의병장도 그가 병으로 죽은 것을 한 팔을 잃은 것같이 애석하게 여겼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기를 "아들은 당연히 죽을 일에 죽었으니 아버지도 죽을 일에 죽은 것이다. 한 집안에 효도와 의리가 어찌 그리 혁혁하오. 원컨대 시종일관하여 국사에 힘을 다하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286·28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휘정 자 : 연옥(延玉) 경상북도 영주(榮州) -
본문
본관은 선성(宣城)이고, 자는 연옥(延玉)이다. 출신지는 경상북도 순흥(順興)(현 영주시(榮州市) 순흥면(順興面))이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1841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895년 당시 순흥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895년 말 충북 제천(堤川)에서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며 순흥에서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이때 유인석은 ‘능히 한쪽을 담당할 만하다’고 하였고, 문경(聞慶)에서 일어난 이강년(李康秊)도 ‘의로운 기상(氣象)’이라 칭송하였다.1896년 5월, 고종이 칙유(勅諭)로 의병 해산령을 내리자 왕명을 빙자한 경군(京軍)이 내려와 의병을 탄압하였다. 여러 차례 전투를 치루는 동안 군사는 흩어지고 무기는 고갈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험한 산곡(山谷)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항전에 대비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적군이 몰려와 붙잡으려하자 아들 김건규(金建奎)가 자청하여 잡혀가 옥에 갇혔다.얼마 후 아들이 대신하여 형(刑)을 받고 사망하였다. 유인석 의병장이 이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천고의 대의를 일으키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죽음을 대신하였으니, 이는 효도에 죽고 또 대의에 죽은 것이라. 모두 천하 후세에 길이 칭찬받을 일이다”라고 위문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강년도 사람을 보내 “아들은 당연히 죽을 일에 죽었으니 아버지도 응당 죽을 일에 죽을 것이라. 한 집안에 효도와 의리가 어찌 그리 혁혁한가. 원컨대 시종일관하여 나라 일에 힘을 다하도록 합시다”라고 하여 아들의 죽음을 위로해 주었다.위문에 대해 친족 김영시(金永詩)를 보내 답례하였다. 그 후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당한 부상과 또 아들을 먼저 보낸 충격으로 1901년 10월 10일 병사하였다. 이강년은 “의기로써 깊이 서로 믿어 왔는데, 그가 병사하였다”면서 통탄하였다고 한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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