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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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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致順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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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2001 훈격 애국장
1907년 이강년 의병장(李康秊義兵將)이 재거의한 이래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충북 제천(堤川), 영춘(永春), 단양(丹陽)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강년 의병장(李康秊義兵將)의 순국 후에는 김상태 의병장(金尙台義兵將)의 휘하에서 계속하여 활동하다가 1909년 11월 향리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압송 도중 탈출을 기도(企圖)하다가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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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북 순흥(順興) 사람이다.

이강년(李康秊) 의진(義陣) 및 김상태(金相台)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그는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자 이강년 의진에 가담하여 충북 제천(堤川)·영춘(永春)·단양(丹陽)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강년이 순국한 후에는 김상태 의병장의 휘하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의병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던 1909년 11월 17일 제천경찰서와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의 공동수색대에 의해 김상태 의병장 휘하 윤영석(尹永錫)·윤우석(尹遇錫)·윤영구(尹永九)·김두갑(金斗甲)·김수갑(金守甲)·김봉정(金鳳政) 등과 함께 붙잡혀 압송 도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末의 堤川義兵(具玩會, 집문당, 1997) 450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暴徒에 관한 編冊, 忠北警高秘 제1229호의 1, 1909. 11. 24) 第16輯 59·60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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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치순 - 경상북도 영주 -
본문
경상북도 순흥군(順興郡) 죽면(竹面)(현 영주시(榮州市) 순흥면(順興面)) 덕현리(德峴里) 출신이다. 출신지를 ‘덕연(德硯)’으로 기록하는 자료도 있다. 이는 충북 경찰부장 반도 에지로(坂東榮次郞)가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에게 보낸 보고서( 「暴徒就捕에 關한 (件) (報告)」)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도 에지로가 덕현리의 ‘현(峴)’자를 ‘연(硯)’으로 오기한 것으로 추정되며, 의병활동 당시에 덕현리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미의병기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이강년이 사망하자 김상태(金尙台) 의병부대에 다시 가담해 항쟁을 지속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의병항쟁에 투신하게 된 시기나 이유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김상태 의병부대에서 마지막까지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이 모두 덕현리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 이들과 함께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1907년 8월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를 비롯해 제천으로 모인 각 지역의 의병부대들과 함께 제천 천남(泉南)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무찌른 이강년 의병부대는 주천(酒泉)으로 이동해 지휘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이때 이강년은 4개 군 지역에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아온 김상태와 40여 명의 부대장들의 추대로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었다. 이강년은 1896년 봉기 때 함께 했던 김상태를 중군장(中軍將)으로, 원주에서 원주진위대의 무기를 얻고 군사를 모아 제천으로 진격할 수 있도록 했던 윤기영(尹起榮)을 전군장(前軍將)으로, 백남규(白南奎)를 우선봉(右先鋒)으로 임명하였다. 의병부대를 재정비하고 민긍호 의병부대와 연합해 충주성(忠州城)을 점령하려는 계획이 좌절된 이후, 주로 단양·영춘·영월·청풍 및 경북 북부 지역을 무대로 삼고 항쟁을 전개하였다.이강년 의병부대가 충북 제천·영춘(永春)·단양(丹陽) 일대에서 활동할 때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강년이 1908년 전투 중 총상을 입고 붙잡힌 후 같은 해 10월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다시 김상태가 이끄는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군대해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양상이 점차 확대되어 가자 일제는 의병 탄압을 강화하였는데, 이때 각지에서 이름을 날리던 의병장 민긍호·허위(許蔿)·이강년·신돌석(申乭石)·기삼연(奇參衍) 등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사망하였다. 참여했던 김상태 의병부대는 의병 지도자들이 사망하거나 자취를 감춘 이후 부대장들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일으키거나, 소규모 단위로 유격전을 전개하던 대표적인 사례였다.김상태는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우선봉을 역임하였던 백남규를 비롯하여 정경태(鄭敬泰)·금달연(琴達淵)·최성천(崔聖天) 등을 휘하에 두고, 이강년 사망 이후 의병부대를 이끌며 경북 북부의 소백산을 근거로 풍기·순흥·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이때 같은 고향 출신으로 이강년과 김상태 의병부대에서 지속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김두갑(金斗甲)·김치순(金致順)·김수갑(金守甲)·윤영석(尹永錫)·윤우석(尹遇錫)·윤영구(尹永九) 등 6인과 함께 1909년 11월 17일 제천경찰서와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의 공동수색대에 붙잡혔다. 동료들과 함께 끌려가던 중 탈주를 시도하였지만, 수비대에게 다시 붙잡혔고 결국 총살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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