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대한제국시기에 비서승(秘書丞) 등의 관직을 역임했던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시세를 한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한 대동단(大同團)에 초기부터 참가하며 조직확대에 많은 힘을 쏟았다.
대동단은 독립달성을 위해 전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동년 3월말 서울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함으로써 전국적 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통일·종합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때 그는 주로 진신(縉紳)·유림(儒林) 등의 상류층 인사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았고, 이를 위해 박영효(朴泳孝)·김가진(金嘉鎭)·민영달(閔泳達)·곽종석(郭鍾錫)·맹보순(孟輔淳) 등을 대상으로 포섭활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사들이 냉담하거나 미온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처음의 계획처럼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다만 김가진의 영입을 성사시키는데 그쳤다. 그리고 곽종석 문하(門下)의 유림들을 포섭하기 위해 동년 5월 초순 경남 거창(居昌)으로 내려갔는데, 이무렵 서울에서 최익환 등이 일경에 붙잡히는 바람에 그의 행적이 드러나게 됨에 따라 피신하였다.
1919년 11월에 대동단의 조직이 발각된 후, 그는 1920년 가을에 신태식(申泰植)과 함께 만주(滿洲)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독립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동단의 경상남도 단장을 맡아 동지 포섭 및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1921년 겨울 동단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자 그는 만주로 넘어갔으며, 그후 국경을 왕래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22년에 남만군정서(南滿軍政署)와 연결되어 국내에 잠입하여 경북 문경(聞慶)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동년 6월경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2월에 출옥한 직후부터 다시 항일투쟁을 전개한 그는 동지 신태식(申泰植)·손병선(孫秉善)·신석원(申錫遠)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 노백린(盧伯麟) 명의의 지령문을 수백매 인쇄한 뒤 경남 밀양(密陽)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상해(上海) 망명을 추진했는데, 사전 발각됨으로써 1925년 2월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1년에 순국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188·189·207·208·28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03면
- 동아일보(1922. 12. 23, 12. 30)
-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4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