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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493
성명
한자 金恩錫
이명 金田恩錫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2005 훈격 건국포장
1940년 10월 일본(日本) 명고옥시(名古屋市)에서 기독교회 목사로서 박상동(朴尙東) 등과 함께 기독교 포교를 통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앙양하여 일본화(日本化)를 방지하고 일본의 국력이 피폐한 시기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 등을 협의하고 신사참배(神社參拜)에 불참할 것 등의 신도(信徒) 지도방침을 결정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기소유예(起訴猶豫)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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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기독교 목사였던 그는 1940년 10월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박상동(朴尙東) 등과 함께 겉으로는 기독교 포교를 표방하는 한편으로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특히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지켜내기 위해 한국인의 일본화(日本化) 방지에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는 기독교 모임을 통해 일제의 국력이 피폐한 시기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 등을 협의하고, 신사참배에 불참할 것 등의 신도 지도방침을 결정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特高月報(內務省 警保局 保安課, 1943. 1) 65∼79면
  •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朴慶植, 1975) 65∼7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3권 174∼179면
  • 昭和特高彈壓史(明石博隆·松浦總三, 1976) 제8권 25∼4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은석 - 경상북도 영주(榮州) -
본문
1905년 6월 6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풍기면(豊基面) 성내리(城內里)에서 태어났다. 창씨명은 김전은석(金田恩錫)이다.1935년 7월 동아일보(東亞日報) 풍기지국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11월 29일, 전시체제 하에서 이른바 ‘종교보국(宗敎報國)’을 위해 조직된 영주기독교회연합회(榮州基督敎會聯合會) 결성식에 참여하여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일 결성식 종료 후에는 신도 300여 명과 함께 영주신사(榮州神社)에 참배하도록 당하였다.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목사로 활동하면서, 종교적 성격의 비합법 민족주의그룹을 결성해 포교라는 합법공간을 활용하여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8월 나고야(名古屋)의 기타교회(北敎會) 및 이치노미야교회(一宮敎會)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 그 해 여름 나고야 인근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적 성향의 기독교 목사 등이 박상동(朴尙東) 목사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민족주의그룹으로 결집될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이들은 1940년 8월부터 1941년 12월 일제 경찰에 붙잡힐 때까지 여러 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운동상의 기본적 태도, 실천 활동으로 조선기독교를 이용하는 방법, 시사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핵심 내용을 보면, 기독교 포교라는 합법 공간 이용, 전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과 자주자립 정신의 앙양, 최후에 전 조선민중이 봉기할 시기는 일본의 국력이 가장 피폐한 시기를 포착할 것 등이었다. 특히 신자들끼리 조선말을 사용해 일본화(日本化)를 막고, 신궁·신사(神宮神社)를 배격하고 그 참배를 거부하며, 여운형(呂運亨)을 추장(推獎)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 등에 대해 논의하고 힘을 기울였다.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41년 12월 9일 박상동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혀서, 1942년 1월 17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나고야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일본 당국은 이 사건을 ‘조선기독교 목사 등의 민족주의 및 불령(不逞) 종교그룹 사건’으로 취급하여, 그 전국적 관련성을 고려해 대심원 검사국과도 상의하는 등 신중하게 처리한다면서 오랜 기간 기소를 유보하였다. 미결구류 상태로 계속 끌다가 결국 구류기간이 만료된 1942년 12월 30일 이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귀국하여 경북 예천(醴川)에서 거주하였다.1945년 광복 이후 경북 문경(聞慶)에서 문경교회(聞慶敎會)를 재건하고 문경에서 거주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교도소 선교’가 법제화되어 서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 형목(刑牧)이 정식으로 배치되었는데, 서울형무소 제3대 교무과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과 1956년에 문경에서 도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8년 11월에는 인천소년형무소 교무과장에 임명되는 등 1966년 6월 면직될 때까지 정부의 교회사(敎誨師)로 계속 활동하였다. 이후 인천소년형무소 전도목사로 활동하였으며, 1976년 8월 24일 용인(龍仁)의 낙원수양관에서 초교파적으로 교도소선교회(矯導所宣敎會)가 조직되었을 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88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남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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