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명진은 1927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면서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 평은지부(平恩支部)에 참여하여 1928년 4월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그는 향리인 영주군(榮州郡) 평은면(平恩面) 수도리(水島里)에 아도서숙(亞島書塾)을 개설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영주 농민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7월 영주·봉화지역 농민·청년층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있을 때 김명진을 비롯한 아도서숙의 관계자들인 김종진(金鍾鎭)·김계진(金季鎭) 등 18명이 일제 경찰에 연행되어 60일간의 취조를 받은 후 석방되었다.
김명진은 1932년 9월 중순 안상윤(安相潤)·김종진 등과 수도리의 박승서의 집에서 만나 영주적색농조 반제사건 검거 후의 상황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 후 10월 4일 안상윤이 영주지역 운동을 재건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김명진과 김종진이 이에 동의하였다. 그 다음날인 10월 5일 김항규(金恒奎) 집에서 회합하여 김화진(金華鎭)의 검거로 궤멸된 영주지역 공산주의운동을 활성화시키기로 협의하였고, 이같은 협의에 따라 적농재건투쟁위원회(赤農再建鬪爭委員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영주적농재건투쟁위원회는 안상윤이 지도부 위원 김종진이 적농부(赤農部) 위원, 김명진이 반제부(反帝部) 위원을 맡기로 하였다. 지도부는 적색농조, 반제운동에 대한 당면 전술을 지도하였으며, 적농부는 정기적으로 농민강좌회(農民講座會)를 개최하여 계급의식을 주입하고 의식분자를 획득하여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반제부는 소부르주아지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여 반제동맹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영주에서 적농재건투쟁위원회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1933년 5월 영주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영주군 평은면 수도리에 와서 김명진·김계진 등 8명을 붙잡아 안동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안동경찰서로 압송된 김명진 등 4명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구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1936년 2월 19일 가출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하농민조합운동연구(지수걸, 1993) 449, 450면
- 韓國共産主義運動史(이기하, 1976) 1388~1395면
- 朝鮮日報(1934. 3. 8·5. 24·6. 16·7. 3)
- 東亞日報(1933. 8. 5, 1934. 6. 26·6. 27·7. 3)
- 안동의 독립운동사(김희곤, 1999) 367~372면
- 朝鮮中央日報(1933. 5. 30, 1936. 2. 28)
-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34. 7. 2)
- 刑事事件簿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