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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960686
성명
한자 權泰東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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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2001 훈격 애족장
1929. 12. 4. 경성 제(京城第)2공립고등보통학교(公立高等普通學校) 4학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고무되어 ‘조선어의 문법 및 역사를 교수(敎授)하라’ 등의 요구사항을 담은 진술서를 작성하여 이튿날 5일 동교(同校) 강당에 집합한 3백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낭독한 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동맹 휴교(同盟休校)를 단행할 것을 촉구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징역 8월 집행유예(執行猶豫) 4년을 받았으며 1932. 4월 경북(慶北) 영주군(榮州郡)에서 혁명적 농민조합 및 반제동맹(反帝同盟)의 설립을 목적으로 영주군공산주의자협의회(榮州郡共産主義者協議會)를 조직하는 등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아 전의 집행유예(執行猶豫)가 취소되고 징역 8월이 집행됨으로써 도합 징역 3년 2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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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1926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榮州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는데, 1929년 12월 4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이은 각지의 동맹휴교(同盟休校)에 동조하여 서울 지역의 학생시위를 주도하였다.

권태동은 광주에서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시위운동을 결심하고 "광주학생에 동정한다, 학우회(學友會)의 결산을 보고하라, 모(某) 선생은 교수 태도를 고쳐라, 조선어의 문법 및 역사를 교수하라" 등의 내용이 담긴 진술서 2통을 영주공립보통학교 교장에게 제출하고, 요구가 수용될 때까지 동맹휴교를 단행한다는 것을 통고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5일 동교 강당에 집합한 300여 명의 학생들에게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는 당국의 차별적 조치로 인해 40여 명이 검거되어 부자유의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들만이 좌시하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동정하여 동맹휴교를 단행하여야 한다"고 연설하여 동맹휴교 단행을 주동하였다. 또한 신용우(申用雨)·강대성(姜大成) 등과 함께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을 조직하여 격문의 인쇄배부 및 동맹휴학, 만세시위 등을 주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동교에서 퇴학당하고 징역(懲役) 8월 집행유예(執行猶豫) 4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권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출감 후 1932년 4월 경북 영주에서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 및 반제동맹(反帝同盟)을 설립하기 위해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榮州共産主義者協議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반제동맹의 조직담당자로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고, 전에 받은 집행유예가 취소되어 징역 8월이 추가되어 총 3년 2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被疑者訊問調書(종로경찰서)
  • 東亞日報(1930. 2. 9·9. 15·9. 20·9. 21·10. 17·10. 26·10. 31·11. 1·11. 2·11. 19·11. 20·11. 21·12. 13·12. 16·12. 20·12. 21·1932. 8. 2·9. 20)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0. 12. 19)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92面
  • 騎驢隨筆(宋相燾) 400·411·412面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1933. 12. 22)
  • 朝鮮日報(1930. 11. 20·12. 14·12. 20·12. 21)
  • 殘刑執行指揮書(대구지방법원, 1940. 4)
  • 光州學生獨立運動史(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96), 129·130·136面
  • 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鄭世鉉, 일지사, 1975) 375∼379面
  • 韓國共産主義運動史(李起夏) 第1卷 1385面
  • 日帝下 農民組合運動 硏究(池秀傑, 역사비평사) 448·449面
  • 韓國社會主義運動人名事典(강만길·성대경) 37·38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태동 - 경상북도 영주(榮州) 광주학생운동 동맹시위 주도, 조선학생전위동맹,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본문
1912년 1월 25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에서 출생하였다. 1926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榮州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서울에 유학하여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1929년 12월 4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동맹휴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2월 5일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강당에 모인 300여 명의 학생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는 당국의 차별적 조치로 인해 40여 명이 붙잡혀 부자유의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들만이 좌시하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동정하여 동맹휴교를 단행하여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연설을 진행하였고, 이어 ‘조선어의 문법과 역사를 교수(敎授)하라, 광주 학생에 동정한다, 학우회(學友會)의 결산을 보고하라, 모(某) 선생은 교수 태도를 고쳐라’ 등의 요구 사항을 낭독하였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1927년 3월 개편된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과 관련되어 전개되었다. 같은 해 5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조선학생전위동맹의 반(班)이 설치되면서, 그도 여기에 가입하였다. 조선학생전위동맹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흐름이 옮겨져 12월 2~3일 사이 서울 시내 각 학교 및 주요 장소에서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이때 격문을 통해 검속된 광주 학생의 즉시 석방과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등을 주장하였다. 동교를 포함해 서울 시내에 격문 1,800매 정도를 살포하였다. 일제 경찰의 단속이 시작되어 1929년 12월 39명이 붙잡혔고 그중 19명이 기소되었다. 193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31년 9월, 영주의 김봉호(金鳳鎬)·김계등(金季登)·김화진(金華鎭)·박병성(朴炳星)·정규찬(丁奎燦) 등은 농민운동과 반제동맹을 전개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1932년 3월 무렵 박병성의 추천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혁명적농민조합 및 반제동맹을 설립하기 위해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반제동맹의 조직담당자로 활동하면서 ‘혁명적농민조합의 목적은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고, 반제동맹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을 도모하는 동시에 혁명의 현 단계인 농업혁명의 실현에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는 1932년 2월에 결성된 봉화적색농민조합과 연계하였고, 예천의 혁명적농민조합과도 연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1932년 7월 경북 경찰부 고등과원들이 영주경찰서와 봉화경찰서와 연계하여 관련자 100여 명을 붙잡으면서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는 초기 단계에서 와해하였다. 그 가운데 1932년 9월, 73명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그를 비롯한 12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예심에 회부되었다. 1933년 12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권우섭(權宇燮)·김창희(金昶熙)·권차응(權次應) 등과 함께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전에 받은 집행유예가 취소되어 징역 8개월이 추가되어 3년 2개월 동안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화 5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이 언도한 집행유예의 언도를 취소함 대구지방법원형사부 1934-01-25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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