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1926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榮州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는데, 1929년 12월 4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이은 각지의 동맹휴교(同盟休校)에 동조하여 서울 지역의 학생시위를 주도하였다.
권태동은 광주에서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시위운동을 결심하고 "광주학생에 동정한다, 학우회(學友會)의 결산을 보고하라, 모(某) 선생은 교수 태도를 고쳐라, 조선어의 문법 및 역사를 교수하라" 등의 내용이 담긴 진술서 2통을 영주공립보통학교 교장에게 제출하고, 요구가 수용될 때까지 동맹휴교를 단행한다는 것을 통고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5일 동교 강당에 집합한 300여 명의 학생들에게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는 당국의 차별적 조치로 인해 40여 명이 검거되어 부자유의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들만이 좌시하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동정하여 동맹휴교를 단행하여야 한다"고 연설하여 동맹휴교 단행을 주동하였다. 또한 신용우(申用雨)·강대성(姜大成) 등과 함께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을 조직하여 격문의 인쇄배부 및 동맹휴학, 만세시위 등을 주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동교에서 퇴학당하고 징역(懲役) 8월 집행유예(執行猶豫) 4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권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출감 후 1932년 4월 경북 영주에서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 및 반제동맹(反帝同盟)을 설립하기 위해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榮州共産主義者協議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반제동맹의 조직담당자로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고, 전에 받은 집행유예가 취소되어 징역 8월이 추가되어 총 3년 2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被疑者訊問調書(종로경찰서)
- 東亞日報(1930. 2. 9·9. 15·9. 20·9. 21·10. 17·10. 26·10. 31·11. 1·11. 2·11. 19·11. 20·11. 21·12. 13·12. 16·12. 20·12. 21·1932. 8. 2·9. 20)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0. 12. 19)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92面
- 騎驢隨筆(宋相燾) 400·411·412面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1933. 12. 22)
- 朝鮮日報(1930. 11. 20·12. 14·12. 20·12. 21)
- 殘刑執行指揮書(대구지방법원, 1940. 4)
- 光州學生獨立運動史(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96), 129·130·136面
- 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鄭世鉉, 일지사, 1975) 375∼379面
- 韓國共産主義運動史(李起夏) 第1卷 1385面
- 日帝下 農民組合運動 硏究(池秀傑, 역사비평사) 448·449面
- 韓國社會主義運動人名事典(강만길·성대경) 37·38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