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1919년 영주군 하리면(下里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영주읍의 만세시위는 3월 20일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시위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오하근(吳夏根)과 박인서(朴仁緖)에 의해 준비되었다. 거사일인 3월 20일은 영주읍의 장날이었다. 오전 11시 이들은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힘차게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군중이 시위행진에 돌입하자 일본군 헌병은 총검으로 이들을 탄압하며 해산시켰다. 이러한 영주읍의 만세시위에 고무된 권창수는 4월 4일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하리면 은산동(殷山洞) 황병석(黃炳奭)의 집에서 거사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날 오후 6시경 마침 장이 열리고 있던 은산동 장터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일본군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로 가서 이를 격파하자'고 외쳤다. 그러나 이를 듣고 급히 달려온 일본군 헌병들에 의하여 권창수를 비롯한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권창수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5. 16. 大邱地方法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