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31년 6월경부터 조카인 정충조(鄭忠朝) 등을 지도했다. 1931년 11월 전라남도 여수군에서 일본인 회사인 다카세농장(高瀨農場)의 고율 소작료에 대항하는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 16일 여수군 서정(西町)에 있는 다카세농장 본점까지 80여 명의 소작인을 이끌고 도보로 행진했다. 이때 대표단의 일원으로 진정서(陳情書)를 제출하였다. 소작인은 요구 조건으로 ‘소작료 4할 감하(減下)’ 등을 내걸었다.
1932년 1월 20일경 전라남도 순천군(順天郡)에서 정시환(鄭時煥)의 권유로 비밀결사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에 몸담았다. 11월 하순경 정충조·이기택(李起澤) 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과 사회혁명을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협의했다. 이기택은 같은 해 5월 이래 조선공산주의자통일동맹(朝鮮共産主義者統一同盟)을 조직해 활동한 인물이다.
1933년 5월 상순경 순천읍(順天邑) 저전리(楮田里) 정병권(鄭炳權) 집에서 정충조·선동기(宣東基)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朝鮮共産黨再建全南同盟)을 조직하고, 서기부(書記部) 및 노동부(勞動部) 책임을 맡았다. 17일 밤 여수읍(麗水邑) 봉산리(鳳山里) 의암산(義岩山)에서 이창수(李昌洙) 등과 만나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위한 자금 조달 등에 관해 협의했다. 실천 일환으로 지방별로 분담하여 각지를 돌면서 의무금(義務金)을 모집하고 이를 정영한이 수합하기로 했다. 7월 29일 여수읍 서정 윤선룡(尹善龍, 金善用)의 집에서 「창간선언(創刊宣言)」, 「지구전(持久戰)에 들어가는 부산 구리다(栗田) 쟁의, 전(全) 고무공(護貌工)은 동조 파업을 하라!」 등이 기재된 기관지 『적기(赤旗)』 창간호 40부를 인쇄하여, 선동기와 함께 동지들에게 배포하였다.
1933년 8월경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4년 4월 11일 검찰로 송치되었다. 1935년 10월 2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출판법 위반, 절도죄(竊盜罪)’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전주형무소(全州刑務所)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37년 5월 16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1. 11. 28, 1933. 8. 17, 1934. 1. 30)
- 판결문(判決文)(전주지방법원:1935.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