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남 사람이다.
호남에서 기의한 의병장으로서 부하 30여명을 이끌고 전남 자리(自里)에서 일군과 전투 중 1909년 9월 18일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651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102面
관리번호 | 7205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 ||
---|---|---|---|
성명 |
|
한자 | 金俊吉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본적 |
운동계열 | 의병 | 포상년도 | 1991 | 훈격 | 애국장 |
---|
전남 사람이다.
호남에서 기의한 의병장으로서 부하 30여명을 이끌고 전남 자리(自里)에서 일군과 전투 중 1909년 9월 18일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1 | 김준길 | - | 전라남도 여수(麗水) | - | |
본문 |
1870년 전라남도 여수(麗水)에서 태어났다. 1909년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기까지 행적은 알 수 없다.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고종은 7월 19일 순종에게 황제의 직을 양위하였다. 또한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행정권을 일제에 빼앗겼다. 나아가 협약 시행령에 준하는 부수각서(附隨覺書) 내용을 통해, 일본인이 대한제국 사법 관리에 임용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1907년 8~9월에 걸쳐 대한제국 군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기에 이른다. 대한제국 해산 군인들은 이 조치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으로 분기하였다.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및 군대 해산으로 인해 궐기한 이들을 가리켜 정미의병, 혹은 후기의병이라 부른다.이에 일제는 의병 ‘토벌’에 나섰다. 1907년 7월 하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에 일제는 한국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이후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도합 4차에 걸친 여단급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에 따라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약 5,000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에는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07년 11월에서 1908년 7월까지 매달 평균 1,000여 명의 의병을 학살하였다.전라도 지역은 을미의병 이래 노사학파(蘆沙學派)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계열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이러한 전남 지역에서 부하 20명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18일 전남 여수에서 서남쪽으로 약 40리에 위치한 자리(自里)에서 일본 군경에게 피살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