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에 조선독립문제 상정을 촉구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부(木浦府) 시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전라남도 목포부 양동(陽洞)의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에 재학 중, 동교생들과 함께 『동아일보』 등 기타 신문을 통하여 워싱턴회의가 개최됨을 알고, 조선민족대표자도 반드시 이 회의에 참열(參列)하여 조선의 독립문제를 제출하고 그것을 토론해야 할 것이다, 모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독립운동을 개시한다면 일반 조선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동(同) 회의에 참석하는 조선인 대표자에게 성원을 주며, 또한 일반 조선인의 독립 희망이 얼마나 절실한지 각국 전권위원에게 알릴 수 있으므로 그들의 호응을 얻어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고 판단하였다. 동월 13일 일요일 오후 4시경 천귀례(千貴禮)·김나열(金羅烈)·박음전(朴陰田)·문복금(文卜今)·김연순(金蓮順)·박복술(朴福述)·주유금(朱有今)·김옥실(金玉實)·김귀남(金貴南)·김자현(金慈賢)·이남순(李南順) 등 동교생 12명과 동교 기숙사 내에 집합하여 위와 같은 독립운동을 개시하고, 그 방법으로 다음날인 14일 정오 오포(午砲)를 신호로 삼아 각자 대한제국기(大韓帝國旗)를 휴대하고 교문을 나와 목포 시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동 13일 동 기숙사에서 국기 수십 매를 함께 제작한 뒤, 14일 오전 수업 종료 후 학생과 교사 등이 휴식 중인 정오에 오포를 신호로 20명 모두가 국기를 손에 들고 동교 정문을 나왔다. 이 가운데 11명은 각자 휴대한 국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동교 정문으로부터 목포부 남교동(南橋洞)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를 본 수 명의 학생들은 동교 내에 떨어져 있는 국기를 주워서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고 남교동에서 동부 죽동(竹洞)을 거쳐 창평정(昌平町)·대정정(大正町)을 행진하였다. 만세 시위를 본 학생들은 동교 내에서 국기를 찾아 그것을 휴대하고 동교 뒷문을 나와 십 수명이 일단이 되어 각자 휴대한 국기를 흔들거나, 혹은 손을 들어 모두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외치고 연호하면서 대성동(大成洞) 방면을 행진하였다.
1922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소위 1919년 제령(制令) 제7호(政治에 관한 犯罪處罰의 件)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7월 23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22. 3. 11)
- 假出獄 具申의 件(大邱監獄:1922. 7. 12)
- 재소자신분카드(木浦監獄)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집 1545~154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13집 157~158, 926~928면
- 東亞日報(1922. 1. 23)
- 時代日報(1926. 1. 24)
- 每日申報(1922. 3. 12)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