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충청남도 아산(牙山) 출신이다.
1900년 9월 20일 대한제국군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1901년 3월 4일 육군 보병 참위(參尉)로 임명되어 진위대(鎭衛隊) 제1연대 제1대대에 배속되어 강화도(江華島)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907년 4월 30일 시위보병 제3연대 제1대대로 전속되었다가 다시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였다.
그 해 8월에 일제는 한국군 해산을 단행하였다.
7시 서울 한국군 각 대장을 긴급 소집하여 해산 조칙을 낭독한 후 장곡천(長谷川好道) 일군사령관이 나와 해산을 조용히 실시할 것을 당부하였다.
약 1시간에 걸쳐 군대 해산의 훈시를 받은 각 대장들은 일제의 동향을 어느 정도 알기는 하였으나 군대 해산이라는 의외의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애국적인 장교들은 비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들은 오전 8시 일군 사령관의 관저를 나와 각각 부대로 돌아갔다.
이날 해산식을 거행할 훈련원에는 군부 협판(軍部協辦) 참장(參將) 한진창(韓鎭昌) 이하 부원 일동과 주차 일군 참모장 모전(牟田) 소장 및 그 막료 통감부무관 야진(野津) 군부 고문 등이 이른 아침부터 나와 해산식을 거행할 제반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훈련원 주위에는 일군 기병·공병·보병으로 구성된 혼성부대가 착검하여 삼엄한 경계 태세로 해산할 한국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연 9시 10분 서소문 안에 있는 병영과 서대문 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이준영이 속한 제2연대 제1대대의 장병들이 강제 동원을 거부하고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여 봉기한 것이었다.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이 이날의 서울 시위대 봉기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에 1연대 1대대 병사 591명이 총기로 무장하고 봉기하여 병영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인접해 있던 2연대 1대대의 원문(轅門)쪽으로 달려갔다. 박승환 대대 병졸 3명이 총을 쏘면서 "이놈들아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우리 대대장은 이미 죽었다"고 크게 외쳤다. 이를 전해들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 591명은 일제히 일어나 장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무기고로 달려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를 되찾은 후 봉기한 것이다.
이같이 용감히 일어선 2개 대대의 1180명의 병사들은 재빨리 영외 주위에 보초병을 배치하고 병영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나, 우수한 무장을 한 일군의 즉각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국군은 영내에서 영웅적인 항전으로 공격해 오는 적을 격퇴하여 오전 8시에서 10시 50분까지 약3시간 동안 병영을 사수하고, 그후 일군에 의해 병영을 점령당한 뒤에도 사병들은 용감하게 시가전을 전개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준영은 용감하게 저항하다가 남상덕(南相悳)·이충순(李忠純)과 같이 8월 1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졸업증서 칙령사본
- 군부대신발령장
-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일
- 관보 1907년 9월 21일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56∼46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