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남 온양(溫陽) 사람이다.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가하여 충남 온양, 충북 제천(堤川)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서병림은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륵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丁未7條約)」이 체되는 등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고, 8월에는 일제에 의해 군대까지 강제 해산되어 우리나라는 준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서병림은 이같은 시기에 온양에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그는 온양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그의 군사 수십 명을 이끌고 1907년 10월 이강년 의병진에 합류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을미의병 때 거병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가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김상태(金尙台)를 비롯한 백남규(白南奎)·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운선(金雲仙) 등 유능한 해산군인과 합류하여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그 후 이강년 부대는 북으로 강원도 낭천(狼川;화천)·인제(麟蹄)에서 남으로는 경상도 안동(安東)·영양(英陽)에 이르기까지 주로 태백산맥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서병림은 이같은 이강년 의진에 참여한 이후 충남 온양과 충북 제천 일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뒤 정해창(鄭海昌)이 중군장, 하한서(河漢瑞)가 도선봉, 박갑주(朴甲胄)가 좌선봉장이 되었을 때, 그는 이들과 앞으로 항일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전략·전술을 논의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259·26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