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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550
성명
한자 南榮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26.6 건아단(健兒團) 비밀 결사(秘密結社)에 참여하여 농민 계발(農民啓發)로서 신사회(新社會) 실현을 위하여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되여 퇴교(退校)를 당하고 예심(豫審) 18개월 후 면소(免訴)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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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충남 아산(牙山) 사람이다.

1926년 여름에 조직된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항일학생결사 건아단(健兒團)에 참가 활동하였다. 동교 기숙사내 한국인 학생모임인 「조선인학생담화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건아단은 민족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 건설을 목적한 학생결사였다.

그들은 먼저 농촌사회의 개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그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 지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들은 수원군 안룡면(安龍面) 고견리(古牽里)를 비롯한 부근 여러 마을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단군 연호를 사용한 것이 후일에 말썽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27년 9월에 북도(北道)지방을 수학여행하게 됐을 때, 강원도 등지에서 일인의 대규모 농장을 본 건아단원들은 그 식민성 농장에 분개하고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1928년 6월에 건아단은 당시 일본 동경(東京)에 설치되어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농촌개발'이라는 조선농우연맹의 주장에 합류하여 추진키로 했다. 그것은 건아단의 이상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년에 조선농우연맹이 국내에서 지방강연 등 계몽활동을 할 때, 수원고농의 학생도 연사로 참석하였는데 일제에 의해 강연활동이 중지되면서 여기에 연사로 참석했던 수원고농생 한전종(韓典鍾)은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때 건아단의 조직이 발각되지는 않았으나 단원들은 사태를 중시하고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명칭을 개칭 위장하였다.

그런데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목적을 수행하던 중 일경에 검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때문에 1928년 여름에 계림농흥사는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조직을 개편했으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동결사의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1928년 9월, 그도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18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3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판결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90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5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67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영희 호 : 간송(磵松) 충청남도 아산(牙山) 6.10만세운동, 수원고등농림학교 사건
본문
1905년 12월 30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음봉면(陰峰面) 동천리(東川里)에서 남정일과 조정필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의 18대손이다. 호는 간송(磵松)이다. 1920년대 국내항일운동 단체 건아단(健兒團)등에서 활동하고 농촌 야학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26년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현 중앙고등학교) 5학년 재학 중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운동 계획 단계부터 참여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후 옥에 갇힌 학우를 돕는 일에 적극 나섰다. 학년별로 성금을 모아 면회를 가거나 사식과 내복을 차입(差入)해 주었다. 192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 이하 수원고농, 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과에 입학하였다. 입학 직후 김찬도(金燦道)·권영선(權永善) 등 재학생 10명이 주도하여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건아단(健兒團)에 가담하였다.수원고농은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는데, 구식 건물인 동료(東寮)에는 한국인 학생이, 신식 건물인 서료(西寮)에는 일본인 학생이 생활하였다. 민족차별과 동·서로 학생 간의 크고 작은 충돌 등을 겪으며 한국인 학생들은 1919년 만세운동과 1926년 6·10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26년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가 수원고농 내에 조직되었는데, 이것이 건아단으로 발전하였다. 건아단은 한국인 기숙사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매일 아침 맨손체조와 냉수욕을 하고, 등산과 도보 여행으로 심신을 단련하였다. 또한 도서관을 자치적으로 운영하면서 한글 신문과 잡지를 비치하고 명사 초청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더불어 학교 부근 농촌에 야학당을 설치하고 순번을 정해 한글과 수학, 역사를 강의하였다.건아단은 1927년 여름방학 때 떠난 수학여행에서 강원도의 일본인 대규모 농장을 목격하고 이와 같은 농장 건설을 꿈꾸게 되었다. 이를 위해 1928년에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농촌운동 단체인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원 한전종(韓典鍾)이 조선농우연맹의 순회 강연회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 되자, 조직의 명칭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바꾸었다. 계림농흥사 또한 이상적 농촌 사회 구현을 목표로 내세우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회원들은 여름방학 동안 수차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조직을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바꾸기로 하였다. 조선개척사는 농촌 계몽과 농민 운동을 통해 일본이 외국과 전쟁 중인 상황을 이용해 농민 봉기를 꾀하고, 민족의 자유와 정치적 독립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을 수 있는 단체로 위장할 계획을 세웠다.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활동하나 표면적으로는 농촌사업단체로 위장하고자 한 것이었다.그런데 수원고농 선배로 건아단 조직 이래 단원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던 김성원(金聲遠)이 붙잡히면서 조직이 발각되었다. 김성원은 졸업 후 김해공립농업학교(金海公立農業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는데, 1928년 5월 1일 어린이날 축하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발언을 한 일로 일제 경찰의 주목을 끌었다. 일제 경찰은 김성원의 하숙방을 수색하여 수원고농 후배 우종휘(禹鍾徽)와 주고받은 편지를 찾아내었다. 이로 인해 조선개척사 결성 취지문에 서명한 학생 11명이 모두 붙잡혔다.이 일로 1928년 9월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 동안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다. 1930년 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예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출옥 후 충남도청과 경기도청 토지개량과에 재직하였다. 광복 후 농림부 토지개량과장으로 근무하며 농촌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1960년 경기도 농사원장을 퇴직하고 대한수리조합연합회(大韓水利組合聯合會) 이사로 취임하였다. 1963년 3월에는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옛 동지들과 함께 6·10만세동지회(현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7부터 1974년까지 건국대학교(建國大學校) 교수와 대우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75년에는 소유한 토지를 기증해 간송장학회를 설립하였다. 1994년 5월 아산시 음봉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그의 뜻을 기리는 공적비가 건립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남도 아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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