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503
성명
한자 權周相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4.4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 거사(擧事)를 위하여 대호지면장(大湖芝面長)이인정(李寅正)주동(主動)에 따라 다수(多數) 동지(同志)와 함께 군중(群衆) 1,000여명(餘名)시위 군중(示威群衆)천의(天宜)장터까지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하고 경찰 주재소(警察駐在所)로 몰려가서 기물(器物)파괴(破壞)하는 등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충남 아산 (牙山)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 적서리(大湖芝面 赤鼠里)에 살고 있었으므로 대호지면의 독립만세운동에 한 몫을 하였다. 이해 4월 4일 대호지면 독립만세운동 거사를 위하여 이곳 면장인 이인정(李寅正)을 도와 동분서주하였다. 이인정은 각 마을의 구장에게 도로 보수를 명분으로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통지하고 송재만(宋在萬)의 제의에 의해 면내 유지 남계원(南桂元)을 중심으로 모든 계획을 진행하여 이날 장에 나가 격문 수백 매를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1,00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장터를 누비며 천의(天宜) 장터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이인정의 주도에 따라 다수의 동지와 함께 천의경찰주재소에 이르러 주재소를 파괴할 목적으로 투석 등 폭력으로 시위하다가 4월 4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해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소요·출판법 위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1년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155面
  • 忠節의 고장 唐津(唐津郡 敎育廳 1986. 12. 31 發行) 110·117·120·133·136·137·152·158·159·166面
  • 判決文(1919. 12. 24 京城覆審法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주상 - 충청남도 아산(牙山) 3.1운동
본문
1881년 9월 8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영인면(靈仁面) 신현리(新峴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적서리(赤鼠里)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던 중 4월 4일 대호지면과 천의장터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과 3·1운동이 전개된 이후 서산군 대호지면에서도 송재만(宋在萬)·김동운(金東雲)·강태완(姜泰玩)·한운석(韓雲錫) 등이 주도면밀하게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면서기 김동운, 면내 유지 남계원(南桂元) 등과 협의하여 면장 이인정(李寅正) 명의로 면민들에게 도로 공사에 참가하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여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계획대로 1919년 4월 4일에 수백 명의 인원이 대호지면사무소에 집결하자 면장이 나서 모인 진의를 밝히고 대의를 설명하니 다수의 대중이 응하였다. 이후 약 7km 떨어진 천의(天宜) 장터로 행진하여 약 1,0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에게 태극기와 애국가 등을 돌리며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출동한 일본인 순사 우에하라(上原尙定)·니노미야(二宮)·다카시마(高島)와 조선인 순사보 이재영(李在英)·류기우(柳冀祐) 등이 이들을 강제해산하려는 과정에서 니노미야 순사가 1~2회 권총을 발사하였다. 분노한 군중은 투석을 벌이며 응전하고 주재소까지 추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송봉숙(宋鳳淑)·고울봉(高蔚奉)·남태우(南泰祐)·고수식(高壽植) 등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우에하라 순사 등에게 투석하며 추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송재만·남상직(南相直)·이춘응(李春應) 등과 합류하여 우에하라 순사와 이재영 순사보를 붙잡아 발포한 자들을 응징하였다. 나아가 군중은 주재소에 투석하여 기물을 파괴하였고, 나머지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를 붙잡아 응징하였다. 이후 만세 시위의 주도자들은 다지리(田尻)와 그의 가족에게 엽총 1정·권총 1정·칼 한 자루 및 약간의 총알을 압수하기도 하였다. 이후 출동한 일제 경찰에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 출판법 위반, 공문서위조행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출판법위반, 공문서위조행사 징역 1년(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경성복심법원 1919-12-2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대호지·천의장터4·4독립만세운동기념탑 충청남도 당진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사당 창의사 충청남도 당진시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권주상(관리번호:5503)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