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남도 순천(順天) 출신으로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을사조약 당시 전라북도 임실(任實) 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때 당대의 거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과 친일관료의 매국적인 행위를 규탄하여 의거를 결의하였다.
먼저 면암은 서울의 고관들에게 함께 거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들은 협조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면암은 일찍이 낙안(樂安)·임실(任實) 군수를 지낸 바 있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여 군사적 경험이 풍부한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제휴하여 그의 권유를 받아 태인(泰仁) 지방을 의병운동의 근거지로 정하게 되었다.
그후 면암은 호서 호남 각지로 사람을 보내어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규하는 면암의 창의문(倡義文)에 동조하여 글월로써 동맹을 맺고 관직을 사직하였다.
이로써 면암 의진의 동맹록(同盟錄)이 작성되기에 이르렀다.
1906년 윤 4월 13일(음력)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유생 80여 명의 호응을 받고 많은 포수들이 의진에 합세하였다.
자못 기세를 떨치게 된 의진은 순창(淳昌)으로 진출하여 민중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순창에서 병력을 증강시킨 후 담양(潭陽)으로 진출하려다가 광주 진위대, 남원·전주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자 일본군이 아닌 대한의 관군과 전투를 할 수 없다는 면암의 권유로 의진을 해산하고 의병장 이하 13인은 체포되었다.
그후 조규하는 승주(昇州)지방에서 독자적인 의진을 구성하고 의병장이 되어 많은 의병을 모병하고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의진의 구성이 갖추어지자 승주·보성( 城)·여수(麗水) 등지에서 적군과 여러 차례 접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08년 8월 25일 야밤중에(혹은 1910년) 곡성 선주산(仙住山 혹은 仙蹟山)에서 접전하다가 적의 해침을 당하여 순국하였으며, 그의 내종제 유준기(柳駿基)가 시신을 수습하여 겨우 안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73·74·7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68·369·373∼38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