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전남 순천(順天) 사람이다.
강승지(姜承旨) 의진에 참여하여 전남 흥양(興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륵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륵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 활동·종교 활동·교육 활동·학술 활동 등을 통한 국민계몽운동이었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오응삼은 이 같은 시기에 강승지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강승지 의병장의 명령을 받아 이기춘(李己春) 등과 함께 1908년 10월 29일 전남 흥양주재소에 부임하던 일본인 순사 택전심길(澤畑甚吉)을 습격 처단하였다. 같은 해 12월 20일에도 그는 이기춘 및 동료 의병 8명 등과 함께 흥양군 동면 관덕리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1909년 1월 12일에도 다시 관덕리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발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3월 이기춘과 같이 흥양 주재소 순사들에게 붙잡혔는데, 같은 달 20일 광주지방재판소로 가는 도중 순천군 소안면 장내리 산길에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제13집 709·7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