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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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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亨注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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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09. 3월-5월 양경학(楊京鶴)·김응천(金應千) 등과 함께 전북(全北) 순창(淳昌), 태인(泰仁)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같은해 5월 25일 (頃) 순창군(淳昌郡) 구암면(龜岩面) 에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한경서(韓京西)처단(處斷)하는 등의 활동(活動)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종신 징역(終身懲役)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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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전남 순천(順天) 사람이다.

전북 순창(淳昌)·태인(泰仁)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더니,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여 갔고, 특히 그것은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시기에 김형주는 양경학(楊京鶴)·김응천(金應千) 등과 의진을 조직하여 반일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형주는 1909년 3월 26일 양경학·김응천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전북 순창군 팔등(八等)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에는 전북 태인군 장전(長田) 마을에서도 군자금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25일 양경학·김응천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전북 순창군 팔등면 태자동(太子洞)에서 일본군 밀정으로서 의병들을 체포케 하는데 앞장섰던 한경서(韓京西)를 잡아, 동군 구암(龜岩)면 산속에서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붙잡혀 1909년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10년 4월 2일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종신징역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803∼80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형주 - 전라남도 순천(順天) -
본문
전라남도 순천군(順天郡) 주암면(住岩面) 광천리(廣川里) 출신이다. 1910년 당시 판결문에 24세로 1886년생으로 추정된다. 의병활동 당시 상업에 종사하였다.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를 일제가 강제 해산시켰던 것을 계기로 의병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항일투쟁의 규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참가 의병의 계층 또한 다양해졌다. 1908년 4월에 이르러 통감부와 한국주둔일본군이 지휘 계통을 일원화하고 병력을 증강시키며 의병 탄압을 본격화 하였다. 심지어 4,000여 명의 조선인을 헌병보조원으로 채용하고 각 지방의 상황 파악을 용이하게 하는 가운데, 조선인끼리의 갈등을 유발시키기까지 하였다.그러한 가운데 호남지역 의병은 여타 지역보다 더욱 활발하고 지속적으로 투쟁하였다. 전남 의병은 기삼연(奇參衍) 부대, 심남일(沈南一)·안규홍(安圭洪)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이 전개되었다. 전북은 김동신(金東臣)·문태수(文泰洙)·이석용(李錫庸) 부대가 대표적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의병투쟁이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저지한다고 판단하였다. 일제가 남긴 『조선폭도토벌지』에서는 1906년 3월부터 1911년 6월까지 의병부대 피해로 17,779명 사망, 376명 부상, 2,139명의 포로가 발생하였다고 기록하였다.이즈음 전북 순창과 태인 등지에서 양경학(楊京鶴)·김응천(金應千)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음)2월 5일 의병 5인과 함께 순창군 팔등면(八等面) 월곡리(月谷里) 이장(里長) 장형숙(張亨叔)의 가택에서 80냥의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같은 달 13일에는 5냥과 무명 1반(反)여를 확보하였다. 5월 25일에는 양경학 외 6명과 함께 일본인 군경에게 의병활동을 밀고한 좌부면(左部面) 관북리(官北里)에 거주하는 한경서(韓京西)를 처단하였다.이러한 활동을 하다 붙잡혀 1909년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이듬해인 1910년 4월 2일 대구공소원에서 1심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종신형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1910년 5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강도, 모살 원판결취소 징역 종신 대구공소원형사부 1910-04-0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강도, 모살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0-05-1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강도, 모살 교(絞) 광주지방재판소전주지부 1910-06-1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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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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