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전남 순천(順天) 사람이다.
전북 순창(淳昌)·태인(泰仁)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더니,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여 갔고, 특히 그것은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시기에 김형주는 양경학(楊京鶴)·김응천(金應千) 등과 의진을 조직하여 반일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형주는 1909년 3월 26일 양경학·김응천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전북 순창군 팔등(八等)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에는 전북 태인군 장전(長田) 마을에서도 군자금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25일 양경학·김응천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전북 순창군 팔등면 태자동(太子洞)에서 일본군 밀정으로서 의병들을 체포케 하는데 앞장섰던 한경서(韓京西)를 잡아, 동군 구암(龜岩)면 산속에서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붙잡혀 1909년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10년 4월 2일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종신징역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803∼8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