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충남 연기(燕岐) 사람이다.
1907년 이래 1910년대까지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에서 항일전을 전개한 채응언(蔡應彦) 의병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대한제국의 군대를 같은 해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채응언 의병장은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陸軍步兵副校)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리자 의병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이진룡(李鎭龍)의병장 휘하의 부장으로 평남·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安平)의 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헌병을 사살하였고 또한 함남의 마전도 순사주재소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 뒤 1911년 김진묵(金溱默)의병장의 부장으로 부하 300∼400여 명을 휘하에 두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각도를 신왕귀래(神往鬼來)하면서 항일전을 전개한 바 있다.
1913년 6월 3일 밤에는 황해도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일군수비대를 불질러 일본군 수명을 부상케 하였다. 한편 오승태(吳承泰)와 합세하여 선암(仙岩)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평남 성천군 옥정리(玉井里) 산기슭에 근거지를 두고 부유한 한인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켜 군자금 조달에 협조하도록 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격렬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는 채응언의 활약으로 인해 200여 명 이상의 일본헌병과 부일한국인, 밀정 등이 처단당하자, 일제는 그를 체포하고자 소위 '적괴 채응언 수색대'를 조직하였으며, 현상금 280원을 걸어 일반인에게 밀고하도록 독려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안광조는 이와 같이 신출귀몰하게 활동하던 채응언의진에 소속되어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5년 7월 채응언 의병장 순국 후에도 군자금모집 등 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19년 체포되어 1919년 12월 12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1920년 7월 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總督府官報(1920. 8. 9)
- 判決文(1919. 12. 12. 平壤地方法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