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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712
성명
한자 郭漢紹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2015 훈격 건국포장
1905년 음력 12월 스승 최익현(崔益鉉)의 지시에 따라 항일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고 최익현(崔益鉉)이 작성한 ‘노성궐리사강회시서고조약(魯城闕里祠講會時誓告條約)’에 연명하는 한편 지방향교에 발송하기 위해 동 조약문을 수십 통 복사(複寫), 전달하였으며, 동월 25일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 집회에 참석함.
1906년 음력 1월 최익현(崔益鉉)이 작성한 ‘창의(倡義) 격문(檄文)’ 수십 통을 정서(整書)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으며, 이후 안병찬(安炳瓚), 박창로(朴昌魯) 등과 연락하며 거의(擧義)를 준비하였고, 음력 2월 최익현(崔益鉉)의 지시에 따라 상소문(上疏文),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성토하는 글, 청국(淸國)에 도움을 요청하는 ‘청원청국서(請援淸國書)’ 등을 기초함.
동년(同年) 음력 윤4월 최익현(崔益鉉)의진에 합류하려다 태인의병의 패배 소식이 들리자 음력 5~8월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무기를 매입하고 홍주성(洪州城) 전투에 패배한 의병잔여세력 규합을 시도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거의(擧義) : 의병을 일으킴
  • 정서(整書) : 초안을 정자체로 바르게 정리함
  • 의진(義陣) : 의병의 군진. 의병 부대를 배치한 것.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05년 의병을 일으키자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배포하고, 1906년 상소문과 성토문 등을 작성하였다.

1905년 음력 12월 5일 충남 노성(魯城)에서 최익현(崔益鉉)이 작성한 일본을 구축하자는 내용의 「노성궐리사강회시서고조약(魯城闕里祠講會時誓告條約)」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이 조약문 수십 통을 각 군 향교에 발송하였으며, 1906년 1월 30일 궐리사의 유림집회(儒林集會)에 참석하였다.

1906년 2월 11일 고석진(高碩鎭)ㆍ이양호(李養浩)ㆍ조영선(趙泳善) 등과 함께 최익현 명의의 상소문과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성토하는 글, 이남규(李南珪) 등에게 창의 참여를 권하는 글을 보냈다.

1906년 음력 윤4월 전북 태인(泰仁)에서 창의한 최익현의진에 합류하려 했고, 홍주성전투(洪州城戰鬪)에서 패배한 민종식의진(閔宗植義陣) 등 의병잔여세력 규합을 시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敬菴全集(郭漢紹, 1996) 제1집 60, 62면
  • 國譯 敬菴全集(郭漢紹, 2013) 제3집 256~260, 262~263, 266~268, 270~271, 276면
  • 習齋實記(최제학, 1963) 上권 19면
  • 遯軒遺槁(임병찬, 1957) 제6권 18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곽한소 자 : 윤도(允道), 호 : 경암(敬菴), 경직재(敬直齋) 경기도 지평(砥平). 세종시 연기 거주 중기의병
본문
1882년 2월 15일 경기도 지평군(砥平郡) 북면(北面) 진대곡(眞垈谷, 현 양평군 단월면 봉상리)에서 곽정현(郭定鉉)과 전의(全義) 이씨(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윤도(允道), 호는 경암(敬菴)과 경직재(敬直齋)이다. 집안은 본래 경기도 지평군 일대에서 명망이 있는 향반(鄕班)이었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여파로 지평군을 떠나 선대가 살던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의 온천리(溫泉里, 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와 연기군 고정(高亭, 현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 일대) 지역을 거쳐 연기군 태천(台川, 현 세종시 연기면 수산리 태천)에 정착하였다. 이후 16세 때 부안(扶安) 임씨(林氏)와 혼인한 후 부친이 초빙한 훈장 이연덕(李淵悳)에게 한학을 배웠다. 20세 되던 해인 1901년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제자가 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당시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의 선두에 선 대학자로서 충남 청양군 정산면으로 이거한 후 항일 의병 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최익현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뤄졌다. 최익현은 1906년 1월에 노성(魯城)에서 항일 거사를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궐리사(闕里祠) 강회(講會)를 열어 본격적인 항일 의병 투쟁에 나섰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1905년 11월 25일부터 궐리사 강회를 준비하는 한편, 강회에 참여한 후 항일 거사를 결의하였다. 먼저 계획에 따라 최익현의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을 복사한 후 인근에 널리 전파하고, 각지의 유력한 인사를 방문하여 거사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 1월 예산에서 항일 지도자인 이남규(李南珪)를 만나 최익현의 거사 계획을 알렸고, 홍주 의병의 주도자인 족형 곽한일(郭漢一)을 만나 거의(擧義)를 논의하였다. 1월 11일에는 ‘수의(守義)’를 주장한 전우(田愚)를 만나려고 공주 신전(薪田)에 방문하였으나 외출 중이었다. 서신으로 항일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호응은 없었다. 이 외에도 충남의 여러 유력 인사에게 궐리사 강회 참석을 통보하고,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6년 1월 19일 최익현이 주관한 궐리사 강회에 참석하였다. 강회에는 삼남(三南)의 유생 100여 명이 참석하고, 각 군의 향교에 전달할 「경고조약문(警告條約文)」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이때 최익현 등 29인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후에도 수십 장의 서약문을 복사한 후 각 지역에 조약문을 발송하여 의병 동참을 호소하였다. 궐리사 강회 이후 최익현은 2월부터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 전북 태인에서 본격적인 거의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에 정산의 장구동(藏龜洞)에 머물면서 호서 지방의 항일 지사와 소통하면서 호남에서 진행 중이던 스승의 거의 준비에 힘을 실어주고자 하였다. 또한, 장구동에 머무르게 된 홍주의병 중군장 정재호(鄭在鎬), 호남 태인 의병의 참모인 고석진(高石鎭) 등과 거의를 협의하는 한편 호서 지역의 유림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최익현의 거의를 지원하였다. 이 외에도 최익현을 도와 여러 문서를 기초하였다. 특히, 태인에서 거의를 선포하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지을 때 창의격문 수십 장을 정서(整書)하고 기초하였다. 당시 기초한 문서는 최익현이 고종에게 올린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죄상을 성토하는 「토죄박문서(討罪博文書)」 등이다. 아울러 호남과 호서의 의병장들이 거사를 위해 장구동을 출입할 때 군자금 마련과 거사 협력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2월 21일 홍주의병 안병찬(安炳瓚) 등이 호서 유림과의 창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문하자 최익현과의 거의를 협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3월 15일 홍주의병이 봉기하기 직전까지 최익현이 맹주로 거론되는 등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역할이 작용하였는데 족형인 곽한일이 홍주의병 거의를 도모하였고, 호서의병과 호남의병의 가교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홍주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청주 지역의 유력 인사들을 방문하는 한편, 태천의 본가로 돌아가 집안을 돌보았다. 4월 30일 거의에 동참하려고 다시 정산으로 돌아와 5월 21일 최익현의 태인의병에 합류하고자 최익현의 행방을 탐문하였다. 6월 15일 순창의 경내로 들어갔으나 태인의병의 패산과 스승의 체포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곽한일과 홍주의병의 재기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11월 17일 이남규·곽한일 등이 체포되면서 그 희망마저 꺾이고 말았다. 최익현이 유배지인 일본 대마도에서 단식 끝에 숨을 거두고 그 유해가 1907년 1월 4일 돌아왔을 때 장례를 관장하였다. 1908년 제작된 문집 간행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끝까지 스승을 모셨다. 스승 최익현의 항일 투쟁에 대한 기록인 「문변록(聞變錄)」을 자신의 문집인 『경암문집(敬菴文集)』에 남겨 그 의기를 끝까지 기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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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용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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