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음력 12월 스승 최익현 (崔益鉉) 의 지시에 따라 항일세력 규합 을 위해 힘쓰고 최익현 (崔益鉉) 이 작성한 ‘노성궐리사강회시서고조약 (魯城闕里祠講會時誓告條約) ’에 연명하는 한편 지방향교에 발송하기 위해 동 조약문을 수십 통 복사 (複寫) , 전달하였으며, 동월 25일 노성 (魯城) 궐리사 (闕里祠) 집회에 참석함.
1906년 음력 1월최익현 (崔益鉉) 이 작성한 ‘창의 (倡義) 격문 (檄文) ’ 수십 통을 정서 (整書) 하고 동지 규합 에 나섰으며, 이후 안병찬 (安炳瓚) , 박창로 (朴昌魯) 등과 연락하며 거의 (擧義) 를 준비하였고, 음력 2월 최익현 (崔益鉉) 의 지시에 따라 상소문 (上疏文) , 이등박문 (伊藤博文) 을 성토하는 글, 청국 (淸國) 에 도움을 요청하는 ‘청원청국서 (請援淸國書) ’ 등을 기초함.
동년 (同年) 음력 윤4월 최익현 (崔益鉉) 의 의진 에 합류하려다 태인의병의 패배 소식이 들리자 음력 5~8월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무기를 매입하고 홍주성 (洪州城) 전투에 패배한 의병잔여세력 규합 을 시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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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음력 1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05년 의병을 일으키자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배포하고, 1906년 상소문과 성토문 등을 작성하였다.
1905년 음력 12월 5일 충남 노성(魯城)에서 최익현(崔益鉉)이 작성한 일본을 구축하자는 내용의 「노성궐리사강회시서고조약(魯城闕里祠講會時誓告條約)」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이 조약문 수십 통을 각 군 향교에 발송하였으며, 1906년 1월 30일 궐리사의 유림집회(儒林集會)에 참석하였다.
1906년 2월 11일 고석진(高碩鎭)ㆍ이양호(李養浩)ㆍ조영선(趙泳善) 등과 함께 최익현 명의의 상소문과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성토하는 글, 이남규(李南珪) 등에게 창의 참여를 권하는 글을 보냈다.
1906년 음력 윤4월 전북 태인(泰仁)에서 창의한 최익현의진에 합류하려 했고, 홍주성전투(洪州城戰鬪)에서 패배한 민종식의진(閔宗植義陣) 등 의병잔여세력 규합을 시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敬菴全集(郭漢紹, 1996) 제1집 60, 62면
- 國譯 敬菴全集(郭漢紹, 2013) 제3집 256~260, 262~263, 266~268, 270~271, 276면
- 習齋實記(최제학, 1963) 上권 19면
- 遯軒遺槁(임병찬, 1957) 제6권 18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