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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27
성명
한자 金東鎬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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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0년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회원이 되어 강원도 지역의 자산가들을 조사하여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강원도지역의 활동을 주관하다가 1918년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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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강원 삼척(三陟) 사람이다. 그는 1910년대 국내의 대표적 혁명단체였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약했다.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1915년에 7월 대구(大邱)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삼고 군자금을 조달하여 국내의 혁명기지를 확보하는 한편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함으로써 적시에 폭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관한 포고문을 발송했는데, 이때 그는 강원도 지역의 자산가들을 조사하여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강원도지역의 활동을 주관했다. 1918년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붙잡힌 그는 고초를 치르다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예심종결결정서(1918. 10. 19 공주지방법원)
  • 고등경찰요사 1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673-71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동호 김흥오,김만대,김대호 강원도 삼척(三陟) 대한광복회 사건
본문
강원도 삼척군(三陟郡) 노곡면(蘆谷面) 하군천리(下軍川里)의 유림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편 1877년경 출생했다는 의견도 있다. 본관은 삼척(三陟)이다. 김흥오·김만대·김대호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8년 장석홍(張錫鴻)·심중욱(沈重旭)·심은혁(沈殷赫)·박두진(朴斗鎭) 등과 함께 삼척향교의 재산으로 사립 계동학교(啓東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를 모체로 1911년 9월 1일 삼척 최초의 근대적인 초등학교인 삼척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삼척군 원덕면장(遠德面長)·노곡면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대 국내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창립과 동시에 일정한 조직 편제를 갖춤과 함께 전국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에도 여러 군데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때 강원도지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의 사령관은 박상진, 지휘장(指揮長)은 우재룡과 권영만이었으며, 만주의 사령관은 이석대(李奭大)가 맡았다가 그가 검거된 후에는 김좌진(金佐鎭)이 맡았다. 이렇게 대한광복회로 확대·발전된 후에는 이러한 조직체계와 위의 실천 계획을 바탕으로 군자금 모집과 친일적인 부호나 일본인을 처단하는 활동을 더욱 활발히 벌였다. 대한광복회에서는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관한 포고문을 발송했는데, 강원도지부장으로서 지역의 자산가들을 조사하여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의 제반 활동을 주도하였다. 1917년 (음)8월 서울 인사동에 있는 어재하(魚在河)의 집에서 박상진·우재룡(禹在龍)·손일민(孫一民)·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과 회합하였다. 이들은 ‘국권을 회복하여 한국 영토 내에서 독립국을 형성’한다는 취지로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포고문」에는 “구한국 국권 회복을 위하여 한국인 자산가는 광복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하라. 만약 기밀을 누설하거나 또는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광복회의 정률(正律)에 의하여 처분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할당금액을 기재한 출금요구서와 강원도를 비롯해 경남·충청 등지의 자산가 명부를 작성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포고문」과 명부를 우재룡이 중국 안둥(安東)의 손일민 집으로 가져가서 한글로 번역하고 수십 통을 복제한 후 국내 각지의 자산가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광복회에서는 국내에서 작성한 문건과 명부를 만주로 가져가서 다시 국내로 발송하였다. 이는 비밀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1917년 당시 만주에서의 포고문 발송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국내로의 두 번째 발송은 그해 12월 말부터 1918년 1월 초에 걸쳐 중국 안둥·펑톈(奉天) 등지에서 국내로 이루어졌다. 이때 강원도지부장으로 작성한 자산가 명부를 토대로 강원도에도 포고문 3통이 발송되었다. 1918년 8월경 단원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어 다수가 검거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오랜 기간 고초를 치른 뒤 1919년 2월 28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즉시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24년 서울 묵정동에 있는 요리점 황금정(黃金亭)에서 일제 경찰의 첩자가 독약을 넣은 음식을 먹은 뒤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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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강원도 삼척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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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공원 대한광복단 기념공원 경상북도 영주시
2 사당 애국지사 김동호 사당 강원도 삼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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