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07년 음력 10~12월 전북 무주(茂朱)ㆍ용담군(龍潭郡), 경남 안의군(安義郡) 등지에서 문태수의진(文泰洙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경남 안의 출신의 문태수 의병장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1907년 9월 전북 장수군(長水郡) 양악(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 일명 朴東植)을 만나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맹세하였다. 같은 해 11월 합세하여 박춘실을 선봉장으로 삼아 덕유산(德裕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전라유진소(全羅留陣所)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이후 1911년까지 덕유산을 근거지 삼아 영ㆍ호남을 넘나들며 활약을 펼쳤다.
1907년 음력 10월 하순 문태수 의병장을 비롯한 약 20명의 의병과 함께 전북 무주군 횡천면(橫川面) 와석리(臥石里)의 민가에 들어가 "우리는 의병이니 군수금을 차출하라"고 하며 엽전 1백 냥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음력 11월 중순경 무주군 상곡면(裳谷面) 상조리(上鳥里)에서 같은 방법으로 엽전 1백 50냥, 같은 달 하순경 경남 안의군(安義郡) 북상면(北上面) 황산리(黃山里)에서 엽전 3백 냥, 무주군 상곡면 괴목리(槐木里)에서 벼 1백 석을 모집하였다.
1907년 음력 12월 상순 안의군 북상면 사양동(沙陽洞)에서도 현금 1백 20원, 같은 달 중순경 전북 용담군(龍潭郡) 금곡리(金谷里)에서 엽전 1백 냥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하순 무주군 부남면(富南面) 대곡리(大谷里)에서 엽전 100냥, 무주군 이안면(二安面) 사전리(沙田里)에서 엽전 80냥을 모집하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10년 1월 31일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光州地方裁判所 全州支部 : 1910. 1. 31)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917면
- 全北義兵史(全北鄕土文化硏究會, 1992) 하권 387~38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