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관은 밀양(密陽)이고 전라북도 장수(長水)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불의를 모르는 곧은 성품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주(茂朱)·장수·진안(鎭安)·용담(龍潭) 등지에 국가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九峰山)에서 일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서(文泰瑞;泰秀)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무주 상창곡(商昌谷)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무주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鎭安) 천반산(天盤山), 성수산(聖壽山), 장수 덕유산(德裕山), 구천동 적상산(赤裳山), 토옥동(土沃洞) 문성어전(文城於田), 농수리(農水里), 양악(陽岳), 진도리(眞道里)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金聖凡)·문태서를 부장(部將)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북과 전북을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함양 수비대장 조사(鳥飼)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長溪)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던 문성(文城) 동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이곳에서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순사(自盡殉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24·225면
-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록 5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2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120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8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