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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144
성명
한자 金文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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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28 윤학조(尹學祚), 권청학(權淸學)등과 같이 심검당(尋劍堂)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결정하고 3. 30 대구(大邱) 남문(南門)장터에 모인 군중 3,000여명에게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케하다 일군경(日軍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 10월 받았으나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1월 12일간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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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達城郡 公山面 道鶴洞)에 있는 동화사(桐華寺) 부속의 지방학림(地方學林)학생으로 있던 중 권청학(權淸學)과 함께 윤학조(尹學祚)에게서 민족독립을 위해 학생들이 궐기해 줄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따라 3월 28일 심검당( 劍堂)에 모인 학생들에게 발의하고 학생들의 찬성을 얻어 의거일을 3월 30일로 약정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면서 준비를 갖추어 갔다.

3월 29일 9명의 학생들은 준비물을 감추어 대구로 향하였고 그는 거사 당일 가지고 온 백포(白布)로 큰 태극기를 만들어 장대에 달아 들고 학생들과 더불어 남문(南門) 장터로 잠입하였다. 오후 2시가 되자 대구 남문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의 군중앞에서 태극기를 높이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군중은 여기에 호응하여 학생들을 선두로 장터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때 그와 함께 9명의 주동자가 모두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해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받고 항고하였으나 이해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과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항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4. 12 大邱地方法院)
  • 判決文(1919. 5. 19 大邱覆審法院)
  • 判決文(1919. 7. 3 高等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7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60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문옥 - 경상북도 대구(大邱) 3.1운동
본문
1898년 2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칠성동(七星洞, 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경북 달성군(達城君) 공산면(公山面) 도학동(道鶴洞, 현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위치한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地方學林)의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30일 대구부 덕산정(德山町) 남문 밖 시장(현 염매시장)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한 불교중앙학교 학생 윤학조(尹學祚)가 고향인 달성군 공산면으로 내려와 고향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다. 동화사 아미산 포교당에서 권청학(權淸學)과 함께 윤학조를 만났을 때 동화사 지방학림이 중심이 되어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받았다. 이후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을 대웅전 옆 심검당(尋劍堂)에 불러 모아 ‘신문 기사를 보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 내 각지에서는 벌써 독립 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도 한국민족의 일원으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역설하며 학생들의 찬동을 얻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처음 시위 장소는 공산면에 있는 백안시장이 거론되었으나 규모를 고려하면 시위의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여 시위 장소를 변경하기로 하였다. 논의 끝에 동화사 대구 포교당에서 가까운 덕산정 시장(남문 밖 시장)을 시위 장소로 하고, 거사 일은 3월 30일 장날로 정하였다. 3월 29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이성근(李成根)·이보식(李普湜)·김종만(金鍾萬)·박창호(朴昌鎬)·김윤섭(金潤燮)·허선일(許善一)·이기윤(李起胤)·권청학 등 8명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 등 시위 물품과 깃대를 휴대하고 대구의 동화사 포교당으로 갔다. 동화사 포교당에 도착한 후 가지고 온 흰 천을 이용하여 대형 태극기 1개를 만들었다. 그날 밤은 포교당 김상의(金尙儀)의 방에서 숙박하였다. 3월 30일 거사 당일,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 등을 감추어 덕산정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2시경 2,000~3,000명 모인 시장 중앙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자 그 자리에 있던 군중이 적극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를 외쳤다. 급보를 받은 일본 경찰이 달려와 군중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해산하였다. 이때 지방학림 학생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 일로 동화사 지방학림은 1개월간 강제 휴교 조치를 당하였다. 1919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7월 3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0월 대구지방법원 1919-04-1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0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형사제2부 1919-05-19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7-0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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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군위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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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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