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노수덕(盧修德)·이재희(李在熙)와 함께 비밀결사 상의회(商議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과 의병가족 후원활동을 폈다. 그후 1917년 9월 이현수(李賢壽)·노수덕을 상해와 만주에 파견하여 이시영(李始榮)등의 독립운동가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보냈다고 한다.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대구소재 재전당서포(在田堂書 ) 출판부에 근무하는 것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전단을 인쇄·배포하였으며 일경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병을 얻어 풀려났다.
1920년 8월 임시정부에서 특파된 이현수가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경고문·자유신보(自由新報)·물품불구매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납세거부서·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등을 휴대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이현수를 도와 이 문서들을 복사한 후 1921년 2월말까지 곽종해(郭鍾海)·정팔진(丁八鎭) 등과 함께 경불 일대의 관공리·자산가들에게 이를 우송하는 한편 대구 시내 상점과 도로상에 살포하여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이들은 다시 임원조(林元祚)를 영천군(永川郡), 이상철(李相徹)을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 박기석(朴奇石)을 안동군(安東郡) 교통사무특파원으로 삼고 안동·영천·대구·경주지방의 관공서 및 도로상에 이 문서들을 살포하였다.
또한 이들은 1923년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림으로써 각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대구·평양·전주 등지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의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우송하고 워싱턴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및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는 1923년 1월 일경에 붙잡혔으나 사전에 증거를 인멸하여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후 그는 계롱산에서 동흥의숙(東興義塾)이란 서당을 열고 청소년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면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1923. 1. 31)
- 조선일보(1923. 1. 30)
- 고등경찰요사 213∼2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