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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530
성명
한자 文錫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1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895. 9. 18((陰)) 충남(忠南) 대덕군(大德郡) 유성(儒城)에서 거의 토적(擧義討賊)을 기치로 기의(起義)하여 회덕(懷德)으로 진군(進軍), 군사를 모은 후 회덕관아(懷德官衙)를 습격, 무장(武裝)을 갖추고 선봉장(先鋒將)김문주(金文柱), 중군장(中軍將)오형덕(吳亨德) 등을 임명, 진용(陣容)을 정비하여 진잠(鎭岑)을 거쳐, 공주(公州)로 진군하던 중 동년 10월 28일((陰)) 관군(官軍)과의 전투에서 패전(敗戰)하고 피체(被逮)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재거의(再擧義)를 도모하던 중 병을 얻어 사망(死亡)하기까지 일제(日帝)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이후 의병(義兵)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기폭제(起爆劑)의 역할을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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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경북 현풍(玄風) 사람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최초의 봉기를 이끈 의병장이다. 1895년 2월 공주부(公州府) 영장(營將)에 재직하면서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낼 것을 계획하고 관병 400여 명을 훈련시키다가 붙잡혀 4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년 음력 9월 18일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에 항거하여 충남 대덕군(大德郡) 유성(儒城)에서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기의(起義), 회덕(懷德)으로 진군하여 군사를 모은 후 그곳 관아(官衙)를 습격하였다.

무장을 갖추고 진용을 정비하면서, 선봉장(先鋒將)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장(中軍將)에 오형덕(吳亨德)을 임명하여 진산(鎭山)을 거쳐 공주(公州)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음력 10월 28일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하여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중군장 오형덕 등과 함께 경북 고령(高靈), 초계(草溪)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이에 감역(監役) 윤희순(尹羲淳)은 군자금의 지원을 약속하고 초계군수(草溪郡守)는 신변보호에 나서는 등 재봉기의 준비는 무르익어 갔으나 아쉽게도 거의 직전에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구부(大邱府)에 압송된 그는 심문하는 관찰사를 논박하며 거의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않았다.

1896년 봄 오형덕과 함께 파옥(破獄), 탈출하여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도지휘(都指揮)로서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띄우고 제천의진(堤川義陣)의 유인석(柳麟錫) 의병장과 연계하여 의병 구국투쟁을 모색하는 등 재거의(再擧義)를 계획하던 중 병을 얻어 46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최초로 거의한 그의 봉기는 의병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국사편찬위원회) 189면
  • 소의신편(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249면
  • 구한국관보(제209호, 1895. 11. 10)
  • 의산유고(1934) 제2권 11∼13면
  • 의산유고(1934) 제4권 9·10·11·15·20∼23면
  •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 1976) 제19권 363면
  • 한국사강좌(이광린, 1981) 제5권 377면
  • 고등학교 국사(국사편찬위원회, 1984) 하권 108면
  • 한말 의병전쟁(조동걸, 1989) 2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집 265면
  •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1980) 55면
  • 의병항쟁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4) 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15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석봉 자 : 이필(而弼), 호 : 의산(義山), 본명 : 봉각(鳳珏) 경북 현풍 -
본문
1851년 12월 24일 경상북도 현풍군(玄風郡,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부친 문하규(文夏奎)와 경주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자는 이필(而弼)이고 호는 의산(義山)이며, 본명은 봉각(鳳珏)이다.고려 문신을 이은 가문이지만, 관계(官界)로 진출한 조상은 거의 없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잘하였고, 『육도(六韜)』·『삼략(三略)』 등을 비롯한 병서를 수학하였으며, 고견암에서 3년간 무술을 익혔다. 이후 주역을 공부하다가, 1875년 중국 진링(金陵)으로 건너가 왕시저우(王希周)에게 침술과 한의학을 3년간 배웠다. 1882년 조운리(漕運吏)가 되었고, 1891년 고향에서 문용현과 영파재(映波齋)를 지어 빈민 자제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현풍군수 윤병(尹秉)이 과천군수로 옮겨갈 때 책실로 수행한 뒤 포군장이 되었다.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경복궁 오위장에 특채되었으며, 그해 12월에는 진잠 현감에 임명되었다. 1894년 11월에는 양호소모사로 충남 진잠(鎭岑)의 동학접주 박만종(朴萬宗)을 체포하였고, 충남 연산(連山)·은진(恩津)·진산(鎭山)·여산(礪山)은 물론 충북 청산(靑山)·보은(報恩) 등의 지역까지 출정하여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특히 1895년 1월 24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연산지역 염학동 동학군 진압작전에서 40여 명을 체포하였고 투항자도 400여 명이나 되었으며, 두령 5명도 귀화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공주부의 신영 영장으로 근무하였는데, 관병에게 신식훈련을 시켜 “토왜(討倭)”하려 한다는 고발을 당하여 공주부에 구금되기도 하였다.1895년 8월 명성황후의 시해 소식을 듣자, 9월 초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거의(擧義)를 역설하였다. 그리고 11월 4일 충청도 유성(儒城)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었고, 선봉장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장에 오형덕(吳亨德), 군향관에 송도순(宋道淳)을 임명하였다. 이외에 진사 김종률과 영장 최은동·김성의(金成義) 등이 참여하였고, 지역 유림인 송근수(宋近洙)와 신응조(申應朝)가 지원하였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확산되도록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의병부대를 정비하여 각지에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고,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았다. 이는 공주관아를 선점하여 무기의 열세를 지리의 이점으로 메우고자 한 것이다. 1895년 9월 18일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회덕현을 급습하였고, (음)10월 20일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유성 장대리로 진군하였다. 이튿날 오전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세경은 협조를 거부하고 의병의 동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같은 해 (음)10월 28일 공암을 거쳐 공주로 진격하자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은 전 중군 백락완과 이인 찰방 구완희에게 대응토록 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들과 공주 와야동(현 공주시 소학동)에서 일전을 겨루었으나, 매복해 있던 관군에게 패하였다.이후 중군 오형덕 등과 경상도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우선 고령 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이어 감역 윤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을 약속받기도 하였다.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상금 만금을 그대들에게 걸고 있으니 잠시 숨어 후일을 도모하시오”라고 달래기도 하였으나, 고령 현감의 고발로 12월 24일 붙잡혀 대구부에 구금되었다. 11월 25일 경무관 장규원에게 그간의 경과와 심정을 밝혔고, 11월 28일 관찰사 이중하의 심문 과정에서 관찰사의 불의를 논박하며 의병을 일으킨 취지를 역설하였다.1896년 봄 영장 최은동, 중군장 오형덕과 탈옥에 성공하고 재기를 도모하였다. 4월 서울로 가서 정계 요로와 접촉을 시도하였고,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과도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던 중 병에 걸려 8월 12일 현풍으로 귀환하였지만, 11월 19일 밤 사망하였다.문집으로 『의산유고(義山遺稿)』가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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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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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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