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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431
성명
한자 具璨會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체결을 통분(痛憤)하여 교우(校友)들과 척왜비사(斥倭秘社)를 조직하고 구국 운동(救國運動)에 앞장섰고 또한 신민회(新民會)에도 가담하여 가장 연소한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9년에는 만주(滿洲)에서 독립투사들이 밀송(密送)한 포고문을 국내 유지(國內有志)에게 전달하는 한편 자필(自筆)로 독립사상을 고취(鼓吹)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반포(頒布)하다가 필적(筆跡)이 탄로되어 일경(日警)에 체포, 모진 고문(拷問)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獄中)에서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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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만주에서 활약하고 있는 독립투사로부터 국내동포에게 보내는 포고문과 기타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인쇄물을 받아 국내 유지들에게 살포하고 그 자신이 자필로 이를 복사하여 배포하다가 1909년 12월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로부터 배후인물을 대라는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악형을 받다가 1910년 5월 13일 서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소봉 유묵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구찬회 자 : 찬옥(粲玉), 호 : 소봉(小峯) 경상북도 달성(達城) -
본문
1890년 1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공산면(公山面) 무태리(無台里)에서 아버지 구재서(具在書)와 어머니 인천 채씨(仁川 蔡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산면 무태리는 현 대구시 북구 서변동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으로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이다. 아버지 구재서(1860년생, 자 : 學三, 호 : 勿小齋)는 1907년 2월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의 문하에 들어가 문인(門人)이 되었다. 송병순은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동생으로, 이 시기 충북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활산(活山)에 은거하며 강당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제자의 만류로 실패하였고, 1912년 일제의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고 일제에 항거하여 끝내 자결하였다. 독립운동가 이경희(李慶熙, 1890~1949, 호 池吾)와 구재서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구찬회의 아들 구자덕(具滋德)이 기록한 「애국지사 소봉유묵」(1976)에 의하면, 1906년 봄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융희학교(隆熙學校)로 전학하여 수학하였다. 학내에서 결성된 척왜비사(斥倭秘社)라는 항일 단체에 가담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만주에서 활약하던 김동삼(金東三)이 국내 국민에게 보내온 포고문(布告文)을 김좌진(金佐鎭)이 맡아 인쇄물과 전단 등 일체를 위임하자, 이를 자필로 필사하여 국내에 배포하는 등 항일 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어 1909년 12월 일제 헌병에 붙잡혀 6개월여의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1910년 5월 13일 서울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06년에 수학하였다는 융희학교는 설립 시기가 1908년 8월로 기록상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김동삼의 포고문이나 김좌진을 만나 인쇄물을 받아 배포하였다는 것은 구체적 자료가 없어 확인하기 어렵다. 생가지(生家趾)로 선대 구회신이 무태리로 입향한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던 능성세가(綾城世家)가 대구시 북구 서변동번지에 보존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대구광역시 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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