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896
성명
한자 文泰洙
이명 鳳珍, 泰瑞, 文泰瑞, 文鳳珍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3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8년 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08년 함양군(咸陽郡) 안의(安義)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무주(茂朱) 덕유산(德裕山)을 근거로 하여 영남(嶺南), 호남(湖南), 호서일대(湖西一帶)에서 활약함.
2. 1908년 2월 28일 부하 약 60명과 함께 무주주재소(茂朱駐在所) 습격, 피체(被逮)되었으나 탈출
3. 1908년 4월 부하 약 150여명으로 장수읍(長水邑)을 습격하고 주재소(駐在所) 군아(郡衙) 등에 방화함.
4. 1909년 1월 지례군(知禮郡) 대덕산중(大德山中)에서 안의군 방면(安義郡方面)으로 이동함.
5. 1909년 4월 24일 부하약 40명과 함께 용담군(龍潭郡) 이동면(二東面) 장전리(長田里) 습격(襲擊)
6. 1909년 4월 무주군 내(茂朱郡內)에 "갈충보국(竭忠報國) 하제만민위국의병대장(下濟萬民爲國義兵大將) 문태서지비(文泰西之碑) 명진사해(名振四海) 난진기덕(難盡其德) 무신사월(戊申四月) 일"이란 (碑)군민(郡民)들이 세웠으나 일경(日警)에 의하여 철거됨.
7. 1909년 5월 8일 남원군(南原郡) 문성(文城) 동북방(東北方)에서 부하 100여명과 함께 일헌(日憲)교전
8. 1909년 8월 중순경에는 부하수 10명을 이끌고 전라도(全羅道)에서 충북(忠北)영동(永同), 청산(靑山), 옥천(沃川) 등지에서 활약함.
9. 1909년 10월 30일 경부선(京釜線)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인(日人) 3명을 납치해 감.
10. 1909년 11월에는 무주군(茂朱郡)을 근거로 하여 영동(永同), 옥천(沃川), 청산(靑山), 무주(茂朱), 금산(錦山)등지에서 활동함.
11. 1909년 12월에는 무주(茂朱)를 중심으로 옥천(沃川) 삼월산(三月山), 무주(茂朱), 금산(錦山), 상주(尙州), 청주(淸州), 보은(寶恩)등지에서 활약함.
(폭도사자료(暴徒史資料) 27호, 폭도편책(暴徒編冊) 33호의 1, 42호, 47호, 38호, 54호, 19호, 28호((續)), 40호, 폭도통계자료(暴徒統計資料) 160, 폭도토벌지(暴徒討伐誌)(407)252, 매천야록(梅泉野錄) p. 438, 513 , 대한계년사 하(大韓季年史下) p. 352,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46,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
* 뒤에 왜경 밀정(倭警密偵)에게 골타상(骨打傷)을 입고, 왜경(倭警)피체(被逮). 대구감옥(大邱監獄)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받음(일본광도(日本廣島)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다고도 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남 안의(安義) 출신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438·51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2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599·710·819·829·832·917·120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84·534·53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태수 본명 : 태진(泰珍), 자 : 태서(泰瑞)·봉진(鳳珍) 경남 함양(咸陽)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
본문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서상면(西上面) 상남리(上南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본명은 태진(泰珍)이고, 자는 태수(泰洙) 또는 태서(泰瑞)·봉진(鳳珍)이며, 일반적으로 문태수로 불린다. 17세 무렵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계북면(溪北面)으로 거주지를 옮겼다.1907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될 때 호남창의대장에 임명되었지만 실제로 참여하지는 못하였다.1908년 2월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지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지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 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倡義)하는 마음으로 뭉쳤으니, 4,000년 역사와 500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종성(李鍾城) 등 60명의 의병들과 무주(茂朱) 일본군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5명을 사살하였다. 곧이어 반격을 받고 붙잡혔다가 탈출하였다.그해 4월 10일 신명선(申明善)이 이끄는 150여 명의 의병들과 무주 일대의 일제 시설을 공격하였다. 같은 해 11월 21일 최점록(崔點錄) 등 6명과 전북 무주와 충북 옥천(沃川) 인근에서 활동하던 중, 12월 6일 무주군 상곡면((裳谷面), 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北倉里)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부대가 와해되었다.1909년 10월 30일 옥천의 이원역(伊院驛)에서 화물열차에 군수물자를 싣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일본군 3명을 처단하고 역사(驛舍)와 화물열차를 소각시킨 후 근거지인 덕유산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의 공격이 집중되자, 소부대로 분산하여 무주·장수(長水)·거창(居昌)·함양 등지를 무대로 산발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다.1910년 1월 17일 선산(善山)·무주·개령(開寧) 등지에서 김교관(金敎官)·윤성심(尹聖沈)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1년 여름 80여 명의 의병들과 장수헌병대를 공격하여 10여 명의 일본 헌병을 처단하고 무기를 노획한 후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이동하던 중, 계남면(溪南面)의 갈평(葛坪) 및 계내면(溪內面)의 삼봉리(三峰里) 일대에서 일제 군경의 추격을 받아 전력을 크게 상실하였다. 이후 덕유산을 넘어 함양·안의((安義), 현 함양군) 일대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 8월 17일 고향으로 갔다가 안의헌병분견대에 붙잡혀 거쳐 서울로 이송되었고,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오열사 충혼탑 전라북도 고창군
2 항일의병 13도창의군 탑 서울특별시 중랑구
3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4 비석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경상남도 함양군
5 생가 문태서 의병장 생가 및 사당 경상남도 함양군
6 비석 의병대장 문태서 순국비 전라북도 무주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문태수(관리번호:189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