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강원도 춘천(春川) 사람이다.
관동창의대장으로 강원 삼척(三陟), 경북 울진(蔚珍)·평해(平海)·봉화(奉化)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그것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성익현은 이같은 시기인 1907년 음력 7월경 정경태(鄭敬泰)를 도총장(都總將), 변학기(邊學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部將)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켜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익현은 1907년 음력 7월 25일 이들 의병 지도부와 부하 의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경북 평해(平海) 읍내에 설치된 경무고문분파소를 습격하여 권총 2정과 도검 2자루 등 무기, 그리고 군복 등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7월 하순에는 부하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경북 울진군 읍내를 공격하여 군청 무기고에 있던 화승총 25정, 활과 화살 등 병기를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화력을 증강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같은 해 음력 9월 12일 이강년 의진의 중군장 정정진(鄭正眞)과 합세함에 따라 수백 명에 달한 의병부대를 진두 지휘하여 울진군 읍내를 재차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이들 연합의병부대는 일본 경찰들을 소탕하여 읍내를 완전 장악한 뒤 군청·경무서·우체국과 그 부속관사, 일본인 및 부일배의 가택 10여 호 등을 소각하면서 군자금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하순 울진군 원남(遠南)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고, 이듬해 4월 5일에도 울진군 서면(西面)에서 군자금품을 징발하였다. 이후 다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 성익현 의진은 이강년 및 김상태(金相泰) 의진과 연합하여 1천여 명의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한 뒤, 의진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경북 봉화군 내성(乃城)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연합의병부대는 1908년 5월 18일 내성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 봉화군 서벽리(西璧里)에서 일본군 정찰대를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여 하사 1명과 순사 3명 및 통역 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곧바로 내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반격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이후에는 강원도 태백산(太白山)·경상도 일월산(日月山) 등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계속하다가 잠적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533·583·58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96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270·284·45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3집 574·582·609·76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