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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678
성명
한자 金敬達
이명 金慶達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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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896년 유중락(柳重洛) 이만응(李晩應)거의(擧義)하여 이소응(李昭應)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推戴)하고 춘천 의진(春川義陣)편성(編成)할 때 포군(砲軍)으로 참진(參陣)하고 종군(從軍) 활동(活動)하다가 적군(敵軍)군비(軍備)병력(兵力)등에 대항(對抗)할 수 없어 진세(陣勢)가 흐트러질 때 피체(被逮)되어 전사(戰死)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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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김경달은 원래 춘천부의 포군이었는데 천성이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지방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고조부(高祖父)의 생일에까지 반드시 새로 난 음식을 바쳐서 '김효자'로 불렸다.

일본의 정치 경제적 침탈행위에 분개해 오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고 일제의 내정간섭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에 참여할 뜻을 가졌다.

이때 유중락(柳重洛) 이만응(李晩應) 등을 중심으로 한 선비와 백성들 천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서 습재 이소응(李昭應)을 대장으로 추대한 춘천의진이 형성되었다. 이소응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관망하여 곧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軍情)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이적 금수(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 적자(亂臣賊子)의 도당이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

라는 강경한 격문을 8도에 보내었다. 김경달은 이에 즉각 응하여 유중락 의진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춘천의진은 대개 선비들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술 전략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신우균(申羽均) 김귀현(金龜鉉) 등의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급하고, 성중에서도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생기게 되니 차츰 군심이 흩어져서 형세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서 이소응은 병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몸소 지평(砥平)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협상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2월 17일(음 1월 5일)에 제천의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의진으로 들어갔다.

이때 김경달은 최삼여(崔三汝)의 지평 의진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행군하여서 양근(楊根) 땅 미원(迷源)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세가 매우 불리한데다가 강력한 경군을 만나게 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이때 맹영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은 의병장 최삼여를 죽여 의병진의 활약을 봉쇄하고 경군의 활동을 도왔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김경달은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서서 총을 쏘다가 경군에게 생포되었다.

경군은 그의 용감성에 감탄하여

"네가 만일 우리편이 된다면 죽이지 않겠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큰 소리로

"원래 나라의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전하기 위하여 나섰던 것인데 불행하여 잡혔으니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어찌 뜻을 고칠 수 있느냐."

하며 그대로 총살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65 166 167 2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42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경달 김경달(金慶達) 강원 춘성(春城) 전기의병(춘천의병)
본문
1849년 3월 15일 강원도 춘성(春城) 신동면(新東面, 현 춘천시 산동면) 팔미(八味)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김경달(金慶達)이라는 이명(異名)을 사용하였으며, 본래 춘천부에 소속된 포군(砲軍)이었다. 평소 효성이 깊어 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형제 우애도 남달리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친뿐 아니라 조부와 증조부, 고조부의 생일이면 반드시 새로운 음식으로 생일상을 마련하니 주변에서는 ‘김효자’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연이어서 단발령이 강제 시행되면서 전국에 반일 의식이 고조되었다. 결국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국수보복(國讐報復)’과 ‘근왕창의(勤王倡義)’를 기치로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 세력 구축을 목표로 의병을 일으켰다. 1895년 10월 충청도 회덕·유성·진잠 등지에서 거의한 문석봉 의병부대를 시작으로 1896년 1월 이후부터는 경기·충청·강원도 등지에서 의병부대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전국으로 확산하여 각지에서 의병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강원도 춘천에서는 같은 해 1월 유생 정인회(鄭寅會)와 군인 성익환(成益煥)·유중락(柳重洛) 등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을 규합한 뒤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춘천부 포군으로 이들과 거의의 뜻을 함께하였으며, 단발령을 단행하려던 관리들을 처단하려고 춘천관찰부를 공격하고, 1896년 1월 명망가였던 이소응(李紹膺)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소응은 “관망하여 곧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軍情)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이적금수(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적자(亂臣賊子)의 도당이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라는 척왜격문을 전국 8도에 보냈다. 이어서 단발하고 부임하는 신임 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가평에서 체포, 춘천으로 압송하여 총살하였다. 춘천의병은 증파된 관군과의 전투를 가평 벌업산 일대에서 벌였으나 무기와 훈련 부족으로 춘천으로 후퇴하였다. 의병장 이소응은 지평군수 맹영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으나 오히려 구속되었다. 관군의 연이은 공격으로 이진응 등이 전사하고 의병부대는 패하여 퇴각하였다. 관군이 춘천으로 공격해 오자 잔여 의병을 이끌고 지평으로 들어가 홍천의·최삼여(崔三汝)와 함께 지평군수 맹영재를 회유하여 의병에 합류시키고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거센 관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의병부대가 해산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의병들이 하나둘씩 흩어지는 가운데 양평의 미원(迷源)에서 관군에 맞서다가 그해 2월 생포되었다. 생포될 당시 관군은 그의 용맹함에 감복하여 “네가 만일 우리 편이 된다면 죽이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큰 소리로 “원래 나라의 원수를 갚고, 머리털을 보전하려 한 것인데, 불행히도 잡혔으니 죽는 것이 나의 본분이다. 어찌 뜻을 고칠까 보냐”라고 하며 관군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결국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해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이 그의 장한 기개를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강원도 춘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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