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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1월 19일 경기도 고양군(高揚郡) 숭인면(崇仁面) 안암리(安岩里,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오세덕(吳世德)을 사용하였다.1919년 만세운동 직후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1919년 4월 신현구(申鉉九)를 단장(團長)으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 국내에서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직 구성은 중앙에 재무(財務)·서무(庶務)·통신(通信)·외교(外交)·학무(學務) 등의 부서를 두고, 지방에는 행정단위별로 도단(道團)과 군단(郡團) 등의 지단(支團)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조달하고, 임시정부의 선전 활동과 각종 명령을 이행하며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애국단이 가장 조직적으로 활동한 지단은 철원군(鐵原郡)에서 시작된 강원도단이었다. 철원군단은 1919년 8월 중순 도피안사에서 조직되었는데, 이때 외교부원(外交部員)으로 선임되었다. 단장은 이봉하(李鳳夏), 서무과장 강대려(姜大呂), 재무과장 김완호(金完鎬), 통신과장 박연서(朴淵瑞), 학무과장 박건병(朴健秉), 외교부원은 그를 포함하여 이용우(李龍佑)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이들과 함께 임시정부 성립을 축하하는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철원 사요리(四要里, 현 철원읍 사요리) 우시장에서 태극기와 「대한민국정부 성립 축하회 선언서」 등을 배포하며 군중을 동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1919년 10월 10일 예정대로 철원면내 각지에서 선언서 등을 배포하며 태극기·만국기·미국 국기 등을 내걸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중들의 만세시위를 주도·독려하였다. 이에 철원의 대중들은 호응하며 상점 문을 닫고 시위에 참여하였다.만세시위를 성공적으로 전개한 후, 박건병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내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국내에서 도착한 사람들을 출신지별로 구분하여 내무부 소속 조사원으로 임명하여 정보 수집 임무를 맡겼다. 이에 1919년 11월 임시정부 철원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철혈단(鐵血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920년대 초반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도 참여하였다. 러시아 블라고베셴스크(일명 흑하시)와 중국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다가, 1922년 여름에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한성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중, 1923년 말 천도교 베이징(北京) 교구실장인 김홍선(金弘善)을 통해 구여순(具汝淳)을 소개받아 의열단(義烈團)에 협력하게 되었다. 당시 의열단은 1924년 1월 일본 도쿄(東京)에 단원을 파견하여 일제 고위 관료를 처단하고 주요 건물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먼저 구여순·김정현(金禎顯) 등을 국내로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1924년 12월 서울에 온 구여순을 은신시킨 후, 자금 조달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함께 논의하였다. 이때 구여순은 한성은행을 습격하여 자금을 확보하는 방안을 문의하였지만, 오히려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며 개성부(開城府) 등지에서 수송해오는 현금을 탈취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안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현금 수송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외에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반역자를 처단할 것 등을 논의한 후, 때를 기다리던 중 그 해 12월 24일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것이 바로 의열단의 제3차 폭동계획 혹은 ‘구여순의 군자금 모집사건’이다.종로경찰서에서 신문을 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고,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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