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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1995
성명
손상석
한자 孫尙錫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1883-03-03 사망년월일 1928-03-01
본적 경상북도 영덕 蒼水 葛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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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7 훈격 애족장
1919년 3월 19일 경북(慶北)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창수동(蒼水洞) 창수경찰관(蒼水警察官) 주재소(駐在所) 부근에서 이수각(李壽珏) 등의 한국독립시위운동 취지에 동의하여 2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연창(連唱)하고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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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경북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영덕군의 만세운동 중 영해(寧海)·창수(蒼水)·병곡(柄谷)의 의거는 가장 격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영해읍 장날에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창수면의 유지들도 이 소식을 듣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려고 영해읍으로 향하던 중 시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창수동(蒼水洞)에서 시위를 전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창수동에서는 도로공사로 전답을 강제 수용당하여 일제에 불평을 가진 동민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이에 호응한 시위대가 1백여 명이 되었다. 이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창수동주재소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4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점거한 후 청사에 부속된 유치장을 부수고 총기류, 대검류 기타 서류를 파기하였다. 독립만세의 열띤 시위를 전개한 동민들은 오후 7시 무렵 철수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손상석은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방해·상해·건조물손괴·기물손괴·공문서 훼기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432면
  •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19. 7. 11)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1378, 138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손상석 - 경북 영덕 1919년 경상북도 영덕군 만세운동
본문
1883년 3월 3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갈천(葛川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영덕군 창수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영덕군 만세운동은 평양신학교로 유학 가던 중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접하고 돌아온 북장로교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평소 친분이 있던 구세군 참위 권태원(權泰源),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 북장로교 교회 조사(助事) 정규하(丁奎河) 등과 상호 연락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역 양반세력의 협력을 얻어 시위를 이끌어냈다. 시위는 경찰관주재소·면사무소·공립보통학교·공립심상소학교·우편소 등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격렬한 양상으로도 전개되었다.창수면 만세운동은 영해면(寧海面)에서 전날 시작된 운동에 합류하기로 한 시위대에 의하여 촉발되었다. 영해에서는 3월 18일에 장날을 이용하여 성내장터에서 오후 1시경부터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2,000여 명의 대규모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영해의 시위는 3월 19일까지 이어졌다.창수면에서는 오촌동(梧村洞)·삼계동(三溪洞)에서 십 여 명의 시위대를 조직하여 영해로 향하였다. 영해로 가던 중 이들은 합류하기에 시간이 늦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창수경찰관주재소에서 시위를 여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들은 창수주재소로 향하면서 주변 마을로 들어가 시위의 취지를 설명하고 “한국 독립을 하는데 동참하지 않겠는가”, “창수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고 하면서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신기동에 이르러서는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협의하여 일본에 토지를 빼앗긴 주민들에 시위에 참여를 선전하였다. 신기동을 거치면서 시위대는 150명으로 늘어났고 오후 4시에 창수주재소 부근에 이르러서는 2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이 과정에서 밭에서 일을 하던 중 시위 소식을 들었다. 박재복(朴載馥)과 울진군(蔚珍郡) 출신 배의직이 찾아 와서 “자네는 어째서 일을 하고 있는가, 창주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는데 동행하자”는 권유를 듣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시위대는 이수각(李壽珏) 등이 발의한 한국 독립에 대한 취지에 동의하여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에 모여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이수각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에 들어갔다. 주재소는 사무실 1동, 객사 및 숙사(宿舍) 1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시위대는 숙사의 벽, 천장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건물 내에 있던 공문서를 파기하고 탁자와 잡품 등에 손상을 입혔다. 이어서 마을에 순사들이 숨겨 놓았던 물품을 찾아서 파괴하였다. 이때 만세를 부르며 다른 군중보다 앞서 주재소로 가 숙사와 목욕장을 파괴하였고, 숙사에 있는 의류도 파손하였다. 주재소에서 나와 창수교까지 철수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의류와 책이 많이 남았으니 파괴하자”는 말을 하였으며, 이 말을 듣고 주재소 앞 도로까지 되돌아갔다.이 일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공무집행방해죄, 건조물손괴죄, 기물손괴죄, 공문서훼기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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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위반 징역 1년 대구지방법원 1919-07-1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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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영덕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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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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