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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219
성명
김연순
한자 金演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1881-11-11 사망년월일 1946-10-02
본적 경상북도 영덕 蒼水面 新里洞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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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8~19 경북(慶北) 영덕(盈德)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 창수면(蒼水面)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시위군중 20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창수경찰관 주재소를 습격, 공문서 및 각종 건물, 기물등을 파괴하며 시위하다 체포되어 징역1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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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창수면 창수동(蒼水面蒼水洞)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신기동(新基洞)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이수각(李壽珏)·이현우(李鉉祐)·권재형(權在衡) 등이 영해읍(寧海邑)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영해로 가는 도중,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도로 개설공사로 인하여 일제에게 전답을 강제로 수탈당한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위를 일으키자 곧 1백 50여명이 모이게 되었는데, 그도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하여, 오후 4시경 창수 경찰주재소에 이르렀을 때에는 시위군중이 4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부수고 기물과 서류를 파기한 후, 객사와 주임순사 고목이삼랑(高木伊三郞)의 숙소와 조선인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의 비품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장총 3정과 대검 2개를 빼앗아 파기한 후, 일본인 순사의 가구·의류 등을 완전 파기하고 오후 7시경에 이르러 자진 해산하였다. 그후 그는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7. 11 대구지방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3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78·1379·138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연순 - 경상북도 영덕(盈德) 3·1운동
본문
1881년 11월 11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동(新里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창수면 창수동(蒼水洞)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영덕 지역 만세운동은 3월 18일 일어난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의 대규모 독립만세시위를 시작으로, 군 내 총 9개 면 가운데 영덕면·남정면(南亭面)·지품면(知品面)·영해면·병곡면(柄谷面)·창수면의 6개 면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북부의 영해면·창수면·병곡면 만세시위는 경상북도에서 가장 격렬한 모습을 보였다.영덕군 최초의 시위인 영해면의 만세시위는 지품면 낙평동(洛坪洞)의 교회 조사(助事, 안수받지 않은 목사)로서 새뮤얼 모펫Samuel A. Moffet, (馬布三悅)이 세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자 유학길에 올랐던 김세영(金世榮)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일어난 거국적인 만세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유학을 포기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낙평동 교회의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김세영은 권태원을 만난 이튿날인 3월 13일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렇지만 권태원은 병곡면 송천동(松川洞)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 등과 만나 영해면·병곡면·축산면(丑山面)·창수면 등지의 기독교인과 유림세력 등을 규합하면서 시위계획을 구체화해 갔다.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 경에 영해면 성내동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영해면 북서쪽에 위치한 창수면의 두메 마을인 삼계동(三溪洞)과 오촌동(梧村洞)의 주민 10여 명도 그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일행이 신기동(新基洞)에 이르렀을 때 영해까지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이유로 창수경찰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신기동 마을 구장인 이현설(李鉉卨)과 협의한 후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그 결과 이튿날인 3월 19일 오후 4시 경에 이수각(李壽珏)·권재형(權在亨)·이현우(李鉉祐)·이현설(李鉉卨) 등이 이끄는 200여 명의 군중이 창수주재소 부근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위대에 참가하여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여 사무실, 객사, 주임순사 숙소의 벽과 천장 등을 파괴하였으며, 건물 내 집기와 공문서 등을 파손하였다. 또한 주임순사와 한국인 순사보들이 마을 곳곳에 숨겨둔 여러 잡물과 서적들을 찾아 파괴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7시에 이르러 주재소를 떠나 각자의 마을로 돌아갔다.이후 일본 군경은 만세시위 주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그 결과 1차로 김세영 등 96명, 2차로 남응하(南應夏) 등 74명이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함께 붙잡혔다. 검사 심문 과정에서 “3월 19일 창수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의 벽을 파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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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위반 징역 1년 대구지방법원형사부 1919-07-1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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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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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영해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경상북도 영덕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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